"제 이름과 얼굴을 썼으니 돈을 내세요."
2024년, 뜻밖의 민사소송에 휘말렸다. 원고는 사형수 정모 씨. 2007년 크리스마스에 경기 안양에서 두 초등학생을 유괴·살해하고, 앞서 또 다른 여성까지 살해한 사실이 드러나 사형이 확정된 인물이다. 소송 당한 해 1월 국내 미집행 사형수들을 재조명하는 기획 시리즈에서 이 사건을 다뤘었다.
그가 문제 삼은 건 기사에 등장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이었다. 청구서엔 나름의 계산법까지 있었다. 실명 사용료는 1건당 10만원, 얼굴 사진 사용료는 3개월당 300만원. 기사에 이름과 사진이 등장한 횟수와 기간을 따져 그가 청구한 돈은 총 1천280만원이었다.
흉악범을 보도할 때마다 당사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걸까. 이름과 얼굴에도 저작권처럼 사용료가 붙는 걸까.
법원은 정씨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1심과 항소심 모두 정씨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기사의 내용과 게재 경위, 정씨의 형사사건 경위, 언론기관의 공공의 이익에 관한 법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원고의 주장에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흉악범의 이름과 얼굴은 누가, 무슨 기준으로 공개하는 걸까.
흉악범의 신상공개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2023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는 참여자 7474명 가운데 96.3%가 강력범죄자 신상공개 확대에 찬성했다.
다만 공개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하다. 국민의 알 권리와 범죄 예방이라는 공익이 강조되는 반면,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의자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반론도 맞서고 있다.
◇흉악범 얼굴, 원래는 기자들이 먼저 공개했다?
지금이야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경찰이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를 열었다는 소식이 낯설지 않다. 공개가 결정되면 피의자의 이름과 나이, 얼굴 등이 알려진다.
최근에도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 공개 사례는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제주경찰청은 자신을 스토킹과 성폭력 등으로 신고한 전 연인을 보복 살해한 혐의를 받는 강성은(61)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했다.
같은 달 19일에는 서울 송파구에서 장모를 살해하고 아내를 납치한 혐의를 받는 김성우(26)의 신상이 공개됐다. 앞서 16일에는 인천의 한 대형 상업시설에서 흉기를 휘둘러 시민 8명을 다치게 한 혐의를 받는 최충락(59)의 신상도 공개됐다. 지난 9월에는 같은 국적의 유학생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유기한 혐의를 받는 중국인 정창성(31)의 신상이 공개된 바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절차가 있었던 건 아니다.
정씨가 붙잡힌 2008년엔 지금과 같은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공개 제도가 없었다. 당시에도 흉악범의 이름과 얼굴은 언론에 등장했지만, 경찰이 법에 정해진 심의 절차를 거쳐 공개하는 방식과는 달랐다. 언론이 범죄의 중대성과 국민의 알 권리, 당사자의 인격권 등을 저울질해 보도 여부를 판단해야 했다.
심지어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건 기사에서 피의자의 이름과 성명, 심지어 거주지 주소를 쓰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관행에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 2009년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이다.
당시 강호순은 경찰에 붙잡힌 뒤에도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가렸다. 경찰 역시 그의 얼굴을 공식 공개하지 않았다. 신상공개를 위한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해 1월 31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강호순의 얼굴을 지면에 공개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1면에 강호순의 얼굴 사진을 싣고, 별도로 '독자 여러분께 범인 사진을 공개합니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범죄 방지의 공익'을 언급했다. 흉악범의 신원을 공개하는 것이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추가 범죄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취지였다. 언론이 직접 얼굴 공개의 이유를 독자들에게 설명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물론 모두 같은 판단을 내린 건 아니었다. 한겨레와 한국일보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의자 인권 보호 등을 이유로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어떤 언론은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공익이라고 판단했고, 다른 언론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논쟁은 결국 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2010년 4월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는 조항이 도입됐다.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할지 말지를 두고 언론마다 다른 결정을 내리던 시대를 지나, 수사기관이 일정한 요건에 따라 신상공개를 결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정씨가 2010년 이후 붙잡혔다면?
그렇다면 정씨가 이런 제도가 마련된 이후 붙잡혔다면 어땠을까. 기자가 받은 1280만원짜리 청구서의 운명도 달라졌을까?
김우석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법무법인 명진)에게 물었다.
김 변호사는 "수사기관과 언론이 신상공개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나 결론은 다를 수 있다"며 "그 판단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언론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0년 도입된 신상공개 제도는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할 수 있는 요건과 절차를 정한 것이다. 언론이 신상을 공개하기에 앞서 반드시 수사기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김 변호사는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 개인의 인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공적인 관심사에 해당하고 신상을 공개할 필요성이 충분한 사안이라면, 수사기관이 공개하지 않았더라도 언론에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같은 사건을 두고 수사기관과 언론의 신상공개 판단이 엇갈린 사례도 있다.
2024년 1월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부산경찰청은 1월 9일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를 열고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반면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보다 앞선 1월 3일 피의자의 실명을 보도했다. 수사기관이 공개 여부를 심의하기 전부터 언론이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실명을 공개한 것이다.
당시 NYT는 기사 말미에 덧붙인 정정 설명에서 "피의자의 이름과 직업 등을 경찰이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에서 널리 알려진 정보를 영상과 공적 기록, 이웃 주민 인터뷰 등을 통해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미국은 한국보다 범죄 피의자의 실명 공개에 대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법제와 언론 보도 관행을 갖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언론이 누구의 얼굴이든 마음대로 공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김 변호사는 "신상공개까지 할 만한 사안이 아닌데 무분별하게 공개했다면 손해배상 등 책임을 질 수 있다"며 "사건의 중대성과 공개 필요성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경찰이 공식적으로 공개한 사진이 아닌, 언론이 별도로 입수한 개인 사진을 사용하는 경우는 어떨까.
김 변호사는 "경찰이 공개한 사진이 아닌 다른 사진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며 "경찰에서 신상을 공개할 만큼의 사안이라면 언론이 다른 사진을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결국 관건은 사진을 누가 제공했는지가 아니라, 언론이 해당 인물의 신상을 공개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다.
다만 사진의 입수·이용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별도의 법적 문제까지 모두 면제되는 건 아니다. 대법원은 2009년 판결에서 범죄 피의자의 실명 보도로 얻는 공공의 이익과 당사자의 명예·사생활 보호 이익을 비교해 보도의 정당성을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김 변호사는 정씨가 2024년에 검거됐더라도 신상공개가 이뤄졌을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사형수 사건인 만큼 신상공개가 됐을 것 같다"고 답했다.
◇14년 뒤 또 한 번 달라진 흉악범 신상공개의 법칙
신상공개 제도는 2024년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았다.
그해 1월부터는 '특정중대범죄 피의자 등 신상정보 공개에 관한 법률', 이른바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이 시행되면서 공개 대상과 절차가 대폭 정비됐다.
이전보다 공개 대상 범죄가 확대됐고, 일정한 요건 아래 피의자뿐 아니라 피고인의 신상도 공개할 수 있게 됐다. 수사기관이 당사자의 동의 없이 얼굴 사진인 이른바 '머그샷'을 촬영하고 공개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됐다. 모자를 눌러쓰거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도, 법정 요건에 따라 공개가 결정되면 최근 모습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뀐 것이다.
다만 여기에도 절차는 있다. 범죄가 중대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얼굴이나 공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개의 필요성과 증거 등을 검토하고, 당사자에게 의견을 진술할 기회도 부여해야 한다.
2008년 정씨가 붙잡혔을 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신상공개 제도는 없었다. 이후 2010년 수사기관의 신상공개를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고, 2024년에는 공개 대상과 절차가 한층 구체화됐다.
그사이 흉악범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는 방식은 달라졌다. 다만 수사기관의 신상공개 결정과 언론의 보도 판단은 여전히 별개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 정씨의 실명은 이미 언론을 통해 공개됐지만, 당사자가 기자에게 직접 서류를 보내 자신의 이름과 얼굴 사용에 이의를 제기한 만큼 이번 글에서는 그의 이름을 '정모씨'로 표기했습니다.







댓글 많은 뉴스
이진숙, 유선민 중령 "'내란'이라 말하면 진급, 군 역사에 치부" 기자회견 공유
'6조' 호남 반도체 예산 심의에 카페 대표, 의사가?…민간위원 면면 보니
특전사에 모델 워킹 교육... 박충권 "北은 미사일 쏘는데, 제정신 아냐"
선관위 특검 "'무번호 투표용지' 140여곳 사용, 투표록 40여곳 위변조 의혹"(종합)
李 지지율 전국 2%p 오를 때 TK는 5%p 상승해 26%…PK도 전국 평균 웃돌아 [한국갤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