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김교영] 이황과 조식

입력 2025-05-04 19:40:52

김교영 논설위원
김교영 논설위원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돼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 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조선 명종 시대를 뒤흔든 상소,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의 한 부분이다. 쓴 사람은 남명(南冥) 조식(1501~1572년). 평생 벼슬을 사양했던 조식은 1555년 조정에서 제안한 단성현감을 마다하면서 이 상소문을 올렸다.

을묘사직소는 왕(명종)이 정치를 잘못했고, 그 원인은 왕의 어머니(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에서 비롯됐다고 비판했다. 대왕대비는 궁궐의 과부에 불과하고, 임금은 돌아가신 선왕의 고아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죽음을 무릅쓴 상소다. 명종은 노발대발(怒發大發)했고, 조식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많은 대신과 사관들은 "초야의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했지만, 우국충정은 높이 살 만하다"며 그를 변호했다. 큰 탈 없이 필화(筆禍)는 일단락됐다. 왕을 거칠게 몰아붙인 글도 포용하는 그 시대의 정치 문화는 툭하면 언론을 고소·고발하는 지금보다 윗길이다.

"어리석음을 감추고 벼슬을 훔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나. 몸과 마음이 병든 자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서 봉급이나 챙겨 가면 옳다고 할 수 있는가. 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속이면 옳다고 할 수 있나. 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숨겨 가면서 굴욕을 무릅쓰고 조정에 나가는 것을 방관해도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직책을 감당할 수 없으면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나?" 퇴계(退溪) 이황(1501~1570년)이 69세 때, 관직을 사양하면서 선조에게 올린 사직 상소에 나오는 자문(自問)이다.

이황은 100여 차례 관직을 권유받았다. 받아들인 적도 있지만, 응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벼슬에 들고 날 때를 잘 알고 신중해야 한다는 그의 출처론(出處論)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벼슬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퇴계와 조식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다. 학문적 업적은 웅숭깊다. 두 사람은 기질, 학풍, 현실 인식에서 다름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실천한 선비의 도리, 신하의 처신은 훌륭한 본보기다. 세상은 얄팍하고, 인심은 납작하다. 정치판은 굴종과 맹종, 야합과 결탁, 거짓과 위선으로 엉망진창이다. 서릿발 같은 기개(氣槪)를 보여 줄 누구 없나?

kimky@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