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자주 끌어다 쓰는 소설가 이병주의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문제를 보며 다시 생각하는 명언이다. 이 말에 비추어 보면 박정희 동상을 세우자는 건 신화의 영역이고 박정희 공과 토론은 역사의 영역이다. 박정희를 기억하는 방법은 이제 신화적 서사에서 역사적 토론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래야 박정희에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
지난 8월 19일 대구에서 '박정희 공과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시민 대토론회가 열렸다. 대구의 시민 모임 '토요마당'이 주최하고 지역사회 연구단체 '대구경북학회'가 주관한 자리였다. 박정희를 비판하거나 지지하는 대표적 논객들이 참여하여 뜨겁게 논쟁했다.
입론은 다양했다. 박정희는 독재자일 뿐만 아니라 그가 이루었다는 경제발전도 모순투성이라는 날카로운 평가가 있었는가 하면, 그의 독재는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그 덕분에 경제발전이 가능했다는 호의적 평가가 있었다. 훌륭한 공론의 장이었다. 말하자면 박정희를 역사의 영역에서 다루는 자리였다. 이성적 판단으로, 소통을 통하여, 박정희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고 평가를 하는 공간이었다.
지금까지 대구의 박정희 동상 논란은 이런 역사의 영역이 아니라 신화의 영역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대구시가 동대구역 광장과 새로 짓는 도서관 뜰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려 한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대구 시민의 마음이 갈라지기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고개 숙여 경배하기와 침 뱉기 두 가지밖에 없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만 있었다. 경북의 모 시장이 오래전 말한 바와 같이 박정희는 이 지역에서 반신반인(半神半人)이었다. 아니 그는 오롯한 신(神)이었다.
어떻게 그가 신이 되었으며 왜 그를 신화의 세계에서 기억하려는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비극적 최후가 오히려 그를 몽환적 신화로 만들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어쨌든 대구시가 박정희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방식은 신화 만들기였다. 대구시는 한 번도 시민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경청하지도 않았다. 그냥 믿으라고만 했다.
지금 대구의 '박정희 동상'은 달빛에 물든 신화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그것은 박정희에게도 좋을 리 없다. 왜냐하면 신화의 세계에는 숭앙(崇仰) 혹은 경멸(輕蔑) 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의 많은 달빛 신화는 밧줄에 걸렸다.
1996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북대와 영남대 학생들이 '인혁당 희생자 추모비'를 교정에 세우겠다고 했다. 두 캠퍼스는 순식간에 뜨거운 장소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사법 살인'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진, 인혁당 희생자를 기리자는 학생 측과 이를 저지하려는 우리나라 공안기관 측이 캠퍼스에서 격돌했다.
나는 당시 영남대 총장을 모시는 비서실장이자 교수의 입장으로 추모비를 세우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더 기다리자. 좋은 때가 오면 양지바른 곳에 세우자." 그 후 그 '인혁당 사건'은 재조사와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역사적 신원(伸冤)은 기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 학생들에게 했던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 늘 마음이 무겁다.
지금 박정희 동상을 세우자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싶다. 박정희의 시대가 햇볕에 바래고 시간의 바람을 더 맞고 눈, 비에 깎이고 쓸려 나가고 나서 그러고도 남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박정희의 역사다. 그 세월의 풍화를 더 지켜보자. 그때 가서 동상을 세우든지 말든지 하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2년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리겠다'고 한 것은 바로 박정희를 신화의 세계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옮기겠다는 뜻이었다고 본다.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아버지 시대에 이룩한 성취는 국민께 돌려드리고 그때의 아픔과 상처는 자신이 안고 가겠다.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 마음의 상처와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고 했다.
그렇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역사의 장에서 그의 공과를 토론하는 것이지 신화의 영역에서 달빛에 물든 동상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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