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늘 가는 공원에서 시화전(詩畵展)이 열렸다. 현수막을 보니 눈에 익은 문인단체였다. 파티션 모양의 보드를 세우고 걸개 형식으로 달아 놓은 시화 패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걱정했는데 괜한 기우였다. 방수 기능이 있는 미네랄페이퍼였다.
시와 비. 운치 있는 조합이라는 건 내 생각일 뿐, 관람객이 눈에 띄게 줄었다. 우산을 쓰고 한갓지게 감상했다. 그러는 사이 빗발이 머츰해졌고 관람객도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천천히 이동하던 내 눈에 그가 포착됐다.
내가 알기로 그는 주로 인근의 G공원에서 지냈다. 두 공원을 번갈아 다녔기에 아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노숙자 행색의 그는 구석진 벤치에서 뭔가를 먹거나 폐지함에서 가져온 신문을 읽었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발치 언저리에서 바장거리는 비둘기를 대하듯 심드렁한 표정을 견지했다. 우린 서로를 알지만 모르기로 결심한 사이였다.
나는 내 앞의 시를 읽으면서 흘깃흘깃 그를 살폈다. 그와 나 사이엔 패널이 세 개. 어느새 비는 멎어 있었다. 남은 거리가 패널 두 개로 좁혀졌을 때 그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조그만 수첩과 볼펜이었다. 그때쯤 나는 아예 패널에서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나 그에게 시선을 붙박고 있었다. 그는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나는 슬그머니 그의 뒤로 다가갔다.
놀랍게도 그는 시를 베껴 쓰고 있었다. 다 적고 난 그는 패널과 수첩을 번갈아 보며 내용을 확인했다. 아랫배가 처진 백팩과 땟국물이 흐르는 벙거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를 읊조리고 때로는 뭔가를 메모하는 그를 지켜보면서 나는 두 가지 감정에 사로잡혔다. 노숙자와 시인은 절대 항등식이 될 수 없다고 간주한 데 따른 부끄러움. 그리고 첫키스의 그것처럼 생경한 감동.
철학자 들뢰즈는 '리좀 개념'을 표방하면서 고착된 중심과 위계를 거부한다. 뿌리 내린 그곳을 기준으로 가지를 치고 잎사귀를 다는 수목(樹木)과 달리 리좀은 특정한 중심이 없으며 수직의 위계가 아니라 수평으로 줄기를 뻗는다. 그에 따르면 우리네 삶은 이른바 '수평적 양식'인 셈이다.
나는 이 말을 '너도 나도 중심'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걸 머리에 새겨두었으면서도 가슴으로 놓친 셈이다. 그렇다. 내가 일찌거니 노숙자로 규정한 그 또한 독자이자 시인이었던 것이다. 내 곁에 이른 그의 줄기를 이물질로 여긴 건 착각일까 교만일까. 우리 모두는 곁을 갖고 있다. 곁은 주고 안 주고와 관계없이 확산되고 접촉되며 그것을 '결'이라고 한다. 결은 물결을 닮아 못 타넘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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