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남은 흔적마저 사라진다'… 순종황제 우울한 98주기

입력 2024-04-24 18:09:06 수정 2024-04-24 21:52:26

중구청, 지난 22일부터 순종황제어가길 철거 착수
친일 미화 논란, 교통 불편 민원 속 7년 만에 철거
“굴종 아냐, 대구가 기념할 역사” 반대 목소리도 커
70억짜리 사업, 4억 들여 없앤다…중구청 비판 목소리도

24일 대구 중구 달성공원 앞 순종황제 어가길 모습. 순종 동상이 철거된 채 받침대만 남아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com
24일 대구 중구 달성공원 앞 순종황제 어가길 모습. 순종 동상이 철거된 채 받침대만 남아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com

24일 오전 대구 중구 달성공원 앞 순종황제어가길. 기다란 철근이 보행섬을 모두 막으며 서 있었다. 이를 둘러싼 가림막과 '안전제일' 테이프 사이로 동상 받침돌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철거된 순종 조형물이 있던 자리에는 가림막 한 장이 덩그러니 덮여 있었다. 받침돌 뒷면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이라 새겨진 글씨 아래에는 버려진 캔과 페트병이 나뒹굴었다. 몇몇 행인들은 우산을 치켜들어 동상이 있었던 곳을 잠시 살펴보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구 중구청이 동상 철거작업을 진행 중인 지금, 동상의 주인 순종황제가 우울한 98주기(4월 25일)를 맞는 모양새다. 앞서 순종황제어가길은 교통마비‧친일 등 각종 비판에 직면하면서 철거가 결정됐지만, 막상 철거가 결정되자 되레 반발 여론에 힘이 실리고 있다.

순종황제어가길은 조성 직후부터 철거 결정까지 찬반 논란에 시달렸다. 순종의 남순행은 '굴종의 역사'라는 친일 미화 주장이 불거졌고, 기존 4차선도로가 2차선으로 좁혀진 탓에 주변 교통흐름이 크게 혼잡해졌다는 민원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막상 중구청이 철거 계획을 발표한 뒤에는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 또한 작지 않았다. 실제로 24일 순종황제어가길 주변에서 만난 시민들은 교통 불편을 얘기하며 철거를 반기는 이들도 있었으나, '마음대로 세웠다가 이내 철거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거나 '순종을 암군으로 묘사하려던 일제의 의도를 따라가는 게 아니냐'며 불편해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학계에서도 철거 반대 주장이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지난 22일 언론사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 중구청의 철거 결정 재고를 촉구했다. 순종 황제의 순행이 비록 이토 히로부미가 구상한 것이지만, 뜨거운 항일 열기의 분출로 이어졌으며, 곧이어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사임으로 이어졌다는 취지다.

이 전 위원장은 기고문에서 "당시 황제는 대구에 도착하자 바로 달성공원을 순찰하고 관리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교육과 실업 장려에 쓸 돈으로 7천원을 내렸다. 이는 1897년 독립협회 건립 때 왕실이 낸 3천원보다 배가 넘는 것이라 대구시야말로 기념할 만한 역사를 가진 것"이라 주장했다.

한편 지역사회 일각에서는 수십억의 예산을 투입한 사업을 불과 수년 만에 철회하게 된 중구청을 향한 비판도 나온다. 중구청은 앞서 순종황제어가길 조성에 약 70억원을 투입했고, 이를 도로로 복구하는 데에도 4억원가량을 사용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전영권 대구가톨릭대학교 지리교육학과 명예교수는 "순종황제어가길 조성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충분한 사회 의견 수렴을 거쳤어야 했다. 조성 이후 비판이 계속된 것과 철거 결정 이후 반대 의견이 분출되는 것 모두 의견 수렴 과정이 미흡했다는 방증"이라며 "'조성 당시엔 인근에 아파트가 들어설 줄 몰랐다'는 식으로 면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고 지적했다.

지난 22일 시작된 조형물 해체 및 철거 작업은 오는 26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24일 대구 중구 달성공원 앞 순종황제 어가길 모습. 순종 동상이 철거된 채 받침대만 남아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com
24일 대구 중구 달성공원 앞 순종황제 어가길 모습. 순종 동상이 철거된 채 받침대만 남아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