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불순종'의 시대에 '순종'을 말하다

입력 2021-10-05 10:22:51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순종'(복종, 순명)은 미덕이다.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순수하게 따르는 행위가 '순종'이다. 순수하게 따름이란 어떤 억압이나 강제도 없는 완전한 자유인의 자기 선택의 행위를 말한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순종'을 탁월한 덕목으로 간주해,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했다.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행위가 기독교가 말하는 '순종'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순종'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계몽주의 이후, 자유로운 사회의 이상은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이 된 것 같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말하는 '시민불복종'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미덕이 되어버린 듯하다. 소크라테스는 그 시대가 생산한 '악법'에 따라 독배를 들었지만 우리는 국가가 공표한 법률이라 해도 공정하지 않고,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면 따르지 않으려 한다.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론'에서 평등과 자유의 원칙에 위배되거나, 누구의 자유라도 제한하고 기회균등이 보장되지 않으면 저항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설상가상으로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경험은 '순종'의 개념을 파괴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기야 '순종'이 권력에 굴종하고, 권위와 제도를 떠받드는 사회적 시스템으로 전락한 곳에서 어떤 희망을 기대하겠는가. 그렇다. 개인의 책임과 반성없는 맹목적 '순종'이 얼마나 위험한지 2차세계대전은 말하고 있다. 그것도 기독교 국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덕목인 '순종'이 가장 사악한 도구가 돼 수많은 생명을 짓밟았다.

폭력과 강제에 순치된 현장을 목격한 도르테 죌레는 "'순종'을 기독교 신학의 순수한 용어로, 기독교 윤리의 원리로 다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기독교의 덕인 '순종'은 그 의미를 상실했고, 악의 실체 앞에 '순종'은 의심스러운 덕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 '순종'은 폐기될 운명에 놓였다.

미셀 푸코는 근대 사회를 '규율사회'라 정의하면서 그 특징을 자율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사회라고 했다. 또한 21세기를 성과사회라고 정의한 한병철은 이 사회가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유를 강제하는 자기착취의 사회라고 했다. 이러한 자발적 강제와 자기착취는 나쁜 형태로 변질된 '순종'이다. 이 도둑맞은 '순종'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 어디에서 되찾을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한병철은 이러한 사회적 병폐를 치료할 치료제를 또다시 '순종'에서 찾았다. 그는 '심심함' 속에서 인간이 안식할 때 인간의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다시 살아난다고 했다. 우리도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듣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들으며 진리의 소리에 귀 기울여 들을 때 회복이 일어난다.

기독교 '순종'은 곧 들음이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도 '듣다'나 '귀 기울이다'란 의미로 사용된다. 기독교의 '순종'은 단순히 귀 기울이는데 그치지 않는다. 귀 기울인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워야 한다. 잘 듣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자의식까지 몰아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되 죽기까지 '순종'했다(빌2:6). 오늘 우리 사회는 어느 누구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상대를 향해 소리만 칠 뿐이다. 이 슬픈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라도 들어보면 어떨까.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