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국민의힘 광주광역시 서구갑 당협위원장
진보정당의 강령 작업에 참가했던 분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당내 분파끼리 1년 가까이 피 튀기는 토론과 논쟁, 절충과 타협을 거쳐 강령을 작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완성한 강령은 캐비닛에 넣은 뒤 다시 꺼내 보거나 당원들끼리 내용을 언급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당들은 강령에 온갖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는다. 좌우 정당의 차이도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2017년 19대 대선 당시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이 대표적이다. 문재인·유승민·심상정 후보가 2020년까지, 홍준표·안철수 후보는 2022년까지 달성하겠다는 시한의 차이가 있었을 뿐 공약 자체에는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여야 정당들이 내세우는 콘텐츠에 별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각 정당과 정치세력의 색깔과 정체성을 어렵지 않게 판단하고, 그들에 대한 지지 여부를 결정한다. 유권자들이 그렇게 직관적으로 강령이나 정강, 정책 등을 샅샅이 읽어보지 않고도 정당과 정치인의 정체성을 파악하게 만드는 사건이나 인물 등을 필자는 '상징자산'이라고 부른다.
우파의 상징자산은 건국과 산업화가 대표적이다. 6·25전쟁과 반공도 마찬가지다. 인물로는 이승만과 박정희, 지역으로는 영남의 상징성도 빼놓을 수 없다. 좌파의 상징자산으로는 민주화와 평화, 인권 등이 대표적이며 사건으로는 5·18, 인물로는 김대중과 노무현, 지역으로는 호남이 상징성을 갖고 있다.
상징자산 자체의 의미나 크기만 본다면 우파가 좌파를 압도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우파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좌파의 상징자산은 우파의 한계나 결함을 보완해 주는 성격이었다. 변증법적으로 표현하자면, 우파가 정(正)이고 좌파가 반(反)의 포지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치 현실은 정반대로 전개됐다. 특히 1987년 체제의 정치투쟁에서 우파는 좌파에 완패했다. 우파의 상징자산이 좌파에 비해서 현저하게 열세를 드러냈던 것이다. 지금 건국과 산업화,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나 호감도를 좌파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등 영역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은 좌파의 상징자산을 활동 근거로 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들 시민단체에서 공급받은 콘텐츠를 정치 어젠다로 가공하고, 정치 리더십도 이들에게서 수혈받곤 한다. 즉, 좌파의 거대한 상징자산이 빅텐트를 이루어 좌파 패권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우파 정치세력과 정치인들조차 그 상징자산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36년간 살아왔던 서울 북아현동 자택을 판 돈 대부분을 박원순의 아름다운재단에 기증한 사례는 충격적이다. 심지어 그 자택은 박정희 대통령이 박 회장에게 하사한 것이었다.
평생을 강직한 철강맨으로 살아오고 우파의 산업화 업적을 상징하는 정치인이 오직 협찬과 기부에 기대어 위상을 쌓아올린 대표적인 공짜 인생 박원순의 상징 조작에 현혹된 사례라고 봐야 한다. 누구 탓을 할 것인가. 우파의 정치적 무능력과 미성숙을 한탄할 수밖에. 그래서 필자는 '우리나라 우파가 건국도 했고, 산업화도 했지만 정치는 한 적이 없다'고 평가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비극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우파는 여전히 좌파가 주도하는 어젠다의 정당성을 철저하게 긍정하고, 그들이 내주는 숙제를 풀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좌파가 장악한 언론에 복종하고 그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파 정치인들이 틈만 나면 5·18 묘역에 가서 무릎을 꿇고 노무현 묘역에 참배하는 게 대표적이다.
좌파의 상징자산도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수호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파 상징자산과의 상호 보완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 좌파 스스로 대한민국 편이라는 정체성을 밝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내년 대선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느냐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우파의 정체성을 분명히 내세워서 유권자를 설득하고, 그 지지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진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우파 정치 지도자의 등장과 성공을 간절하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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