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착한 사람의 조건

입력 2026-03-04 10: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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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강우 시인·소설가

심강우 시인·소설가
심강우 시인·소설가

맹탕 씨의 통장에 1백만 원이 입금됐습니다. 그런데 송금자는 맹탕 씨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도 내역을 알 수 없습니다. 다음날 전화가 왔습니다. 실수로 송금한 사람이라며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맹탕 씨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송금자는 입금할 계좌를 불러줬습니다. 그 계좌의 명의가 처음의 명의와 달랐지만 맹탕 씨는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1백만 원을 보내고 난 뒤 맹탕 씨는 뿌듯했습니다. 실수를 한 상대에게 아량을 베풀었다는 자긍심일 수도 있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맹탕 씨가 그 얘기를 하자 딸이 엄지를 치켜세웠습니다. "아빠 착한 사람이네!"

결론부터 말하면 맹탕 씨는 '통장 묶기' 사기를 당했습니다. 게다가 범인이 만든 대포통장에 송금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범죄에 연루됐습니다. 순서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기꾼이 맹탕 씨의 계좌에 일정 금액을 송금합니다. 그리고 은행에 보이스피싱을 당했다고 신고합니다. 은행에서는 신고를 받는 즉시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라 맹탕 씨의 계좌를 동결합니다. 은행 모바일과 인터넷뱅킹은 물론 자동조회와 이체도 막힙니다.

더 황당한 일이 다음날 벌어졌습니다. 송금자가 맹탕 씨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그자는 맹탕 씨에게 신고를 취소해 주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했습니다. 신고자의 신고 취소가 있어야 해제되는 규정을 악용한 것입니다. 단호히 거부한 뒤 경찰에 신고하고 은행에 이의제기도 했지만 애초의 대응이 잘못된 탓에 맹탕 씨는 한동안 힘들게 됐습니다.

맹탕 씨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게 있습니다. 언젠가 한적한 교외 지역을 운전하다 땡볕에 걸어가는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같은 방향이라 태워주려고 했더니 옆에 앉은 H가 말렸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도의적 책임은 물론 금전적 책임도 져야 한다는 말과 함께. 가난한 전업작가의 새가슴인지라 노인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려던 맹탕 씨의 좌절은 우리 사회의 맹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좌표와 같습니다. H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냉혹한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마음 온도를 낮춰야 한다고. 마음 온도를 사회 풍조에 맞춘다는 것. 빠른 계산능력을 중시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때 당당히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게 사회정신의 기조가 되면 타산에 밝은 사람이 판치는 세상이 되는 거 아냐? 이제 와 흥분하는 내가 우습지만 그래도 종내 침묵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맹탕 씨의 딸에게 말하렵니다. 얘야, 길 잃은 어른들이 많단다. 명심하렴. 착한 사람의 조건은 착한 마음 하나로 족하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