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전 한국선거학회장)
사상 초유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니다. 이는 헌법이 보장한 참정권 침해이자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흔든 중대한 제도 실패 사건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 결과의 정당성은 투표 과정의 공정성과 신뢰 위에서 성립한다. 아무리 선거 결과가 정확하더라도 시민이 절차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가 심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사태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한 이론 가운데 하나는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의 '깨진 유리창 이론'이다. 이 이론은 작은 무질서를 방치하면 더 큰 무질서와 제도 붕괴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중앙선관위는 그동안 채용 비리, 가족 특혜 의혹, 소쿠리 투표 등 여러 문제를 경험했지만 충분한 자기 혁신과 책임성 강화를 보여주지 못했다. 작은 균열이 누적되면서 결국 대형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깨진 유리창 이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뮤얼 헌팅턴은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결정하는 핵심 변수로 '제도화'를 제시했다. 제도화란 단순히 조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성, 복잡성, 자율성, 응집성을 갖추고 시민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상태를 의미한다. 선관위의 위기는 단순한 업무 실패가 아니라 제도적 신뢰의 위기다. 선관위가 법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신뢰를 얻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신뢰는 권한이 아니라 책임에서 나온다.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민의 '확산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시민이 제도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면 특정 정책이나 선거 결과를 넘어 체제 정당성까지 흔들릴 수 있다. 실제로 투표용지 부족 규탄 시위에 참여하는 젊은 세대들이 이번 사태를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닌 민주주의 훼손으로 인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투표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주권자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재명 정부가 '국민주권정부'를 강조해 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국민주권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다. 자유롭게 투표할 권리, 동등하게 투표할 권리, 실제로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 시민은 투표하러 갔지만 국가는 충분한 투표용지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는 국가 역량의 실패이며 국민주권 구현의 실패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는 과연 '국민주권정부'라고 할 수 있나?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선관위 개혁은 독립성 훼손이 아니라 책임성과 신뢰 회복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독립기관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하지만 국민의 통제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다.
첫째, 선관위 내부에 상설 준법 감시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금융기관 수준의 내부통제 시스템을 도입하여 채용, 계약, 선거 관리 전 과정을 상시 점검하고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윤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문제를 사후 처벌하는 것보다 사전 예방이 더 중요하다. 둘째, 선관위원 선임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현재의 폐쇄적 구조를 개선해 국회 추천 비율을 다양화하고 시민사회와 학계의 참여를 확대함으로써 정치적 편향 논란을 줄여야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권력 분산과 상호 견제다.
셋째, 선거관리 실패가 발생할 경우 독립적인 사후평가위원회를 자동 가동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독일 베를린 재선거 사례가 보여주듯 재선거 여부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법률과 증거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실제 참정권 침해 규모와 선거 결과 영향 여부를 독립적으로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넷째, 감사원의 선관위 정기 감사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독립성은 무감사나 무책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다만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감사 범위를 인사·예산·행정 운영으로 한정하고 선거 집행 자체에 대한 정치적 개입은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
로버트 퍼트넘은 민주주의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 자산으로 사회적 자본과 신뢰를 강조했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선관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 문화도 약화되고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결국 건물 전체가 무너지듯 작은 선거관리 실패를 방치하면 민주주의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선관위 개혁의 목적은 권한 축소가 아니라 신뢰 회복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거로 시작되지만, 신뢰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