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 물감서에서는 금반 중앙청 지시에 따라 오는 11월 15일부터 현행 이발 요금을 다음과 같이 개정 실시하기로 되었다고 하는데 동 가격 적용 구역으로서는 각 도급 부군 소재지에 한하여 적용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11월 12일 자)
겨울을 앞두고 대구의 이발료가 올랐다. 머리를 깎고 면도까지 하는 조발은 45원, 면도만 하면 25원, 부인 면도는 30원으로 인상됐다. 아이들의 경우는 조발이 25원, 삭발과 단발은 20원이었다. 이발 요금 중에는 유한마담 등이 고객이었을 아이롱이 70원으로 비쌌다. 이발료는 얼마나 올랐을까. 같은 해 남선경제신문 1월 7일 자에는 대구의 물가동향이 보도되었다. 해가 바뀌기 전 12월에 조발은 24원, 화장까지 하면 34원이었다. 퍼머넌트는 70원에서 이미 100원으로 올랐다. 당시 얼굴을 씻는 세안 비누가 30원~70원으로 이발료와 엇비슷했다.
이발소가 사람들 곁으로 온 것은 1895년 단발령이 출발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에는 이용사 자격시험 실시로 면허가 있어야 이발소를 차릴 수 있었다. 1930년 조선에는 3천여 군데의 이발소에 이용사가 1만 4천여 명에 달했다. 그 시절 머리를 깎으면 개화당으로 비난을 받았다.
구한말 일본의 힘을 빌려 제도 혁신에 나섰던 김옥균 등의 당파를 빗댄 말이었다. 머리를 깎으러 와 통곡하거나 머리를 깎는 중에 완고한 아버지가 쫓아와 반만 깎은 채 도망가는 일도 잦았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 이발 업계에서 이름난 안종호의 신문인터뷰에 실려있다.
이발소를 찾는 손님이 많아지면서 이용사는 밤늦게까지 노동에 시달렸다. 시간이 흘러도 좀체 나아질 기미가 없자 이용사들은 근무 여건 개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929년 7월 경북 김천에서는 이발소 종업원들이 근무 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였다. 밤 11시까지의 근무 시간을 밤 10시로 한 시간 줄여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발소 업자들은 발끈했다. 파업에 참여하거나 동조한 종업원은 모조리 해고했다. 또 해고된 종업원들이 다른 지역 이발소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업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발소 종업원들이 근무 여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1958년 2월에는 대구 시내 270여 개소의 이용소에 근무하는 노조원 320여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이윤의 반반 분배와 노동시간 단축 등 모두 15개 항의 조건을 내걸었다. 여러 차례의 협상과 경찰의 중재에도 소득이 없었다. 그때는 이발료 같은 분쟁이 생기면 경찰이 조정과 단속에 나섰다. 설날을 며칠 앞두고 벌어진 파업이어서 시민들의 불편이 컸다. 덥수룩한 머리로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는 하소연이 절로 나올 상황이었다.
이발료의 잦은 인상으로 서민들의 부담은 컸다. 머리 깎는 횟수를 줄일지언정 마냥 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때 가격이 싼 공설 이용소가 생긴 이유였다. 사설 요금이 150원일 때 공설요금은 절반 이하의 요금이었다. 1949년에는 이발료가 190원으로 인상되자 잔돈 실종 같은 하소연이 나왔다. 200원을 내면 잔돈을 내주지 않아서다. 서민들에게는 목욕료도 이발료만큼 부담이었다. 이때의 목욕료는 90원 안팎이었다. 목욕은 특별한 날에만 하는 연례행사와 다름없었다. 오죽했으면 노동자들이 파업 때 목욕탕 설치를 요구했을까.
대중목욕탕은 일제의 목욕문화로부터 유입됐다. 목욕탕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나둘 생겼고 조선인들도 출입하기 시작했다. 목욕을 자주 가는 사람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목욕객으로 가장하고 손님들이 벗어놓은 옷을 털어 금품을 훔치는 절도범들의 표적이 되었다. 대구의 여러 목욕탕을 오가며 600여만 원을 훔친 절도범이 잡히기도 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겨라"는 문구는 이때 이미 나왔다.
목욕탕도 이발소처럼 파업을 벌였다. 목욕료 인상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1957년에는 석탄을 주지 않는다고 목욕탕이 문을 닫았다. 다만 이발소와 다른 점은 종업원이 아니라 업주가 파업했다. 목욕료는 이발료와 함께 물가통제의 대상이었다. 이제 동네의 이발소와 대중목욕탕은 물가통제는커녕 찾기조차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가깝게는 코로나19의 타격에다 생활 방식마저 변화한 영향이 크겠지만 동네의 미래를 비추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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