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34> 구약의 ‘아가서’, 여성의 심미적 주체성

입력 2024-05-06 12:28:07

이경규 계명대 교수

프랑스 파리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 소장된 귀스타브 모로의 '술람미 여인(아가서)'.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제공
프랑스 파리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 소장된 귀스타브 모로의 '술람미 여인(아가서)'.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제공

'아가서'는 매우 문학적인 성경이다. 단어·문장·서사 구도와 같은 언어방식이 그러하고 내용도 문학의 주요 관심사인 남녀의 사랑이다.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이다. 성경인데도 하나님이란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최소한 언어적 표층만 보면 그렇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축자적인 의미는 외면하고 우의적(allegorical) 해석에 골몰했다. 감각적·육체적 언어는 모두 추상적·정신적 언어로 바꾸어놓았다. 남과 여의 자리에 하나님과 그의 선민을 밀어 넣고 예수님과 교회를 내세웠다. 물론 그러한 바꿔치기를 모두가 환영한 것은 아니다. 반발은 급기야 '아가서'를 섹스 예찬이나 성생활 지침서로 읽겠다는 데로까지 나아갔다.

이렇게 문제적인 텍스트가 어떻게 성경 안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나 문학적으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다. 사실 성경에 남녀상열지사는 곳곳에 포진해 있는데, '아가서'만큼 배신과 일탈로 얼룩지지 않는 로맨스도 잘 없다. 게다가 '아가서'만큼 여자의 노골적이고 주체적인 성애를 표현한 성경은 없다. 남자에 대한 여자의 관심이 거의 몸에 쏠려 있다는 점은 현대라 해도 놀랍다. '아가서' 5장을 보면 여주인공 술람미는 목동인 애인(신랑)의 몸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바, 직유와 은유를 총동원한다.

"체격은 백향목처럼 빼어나고 머리는 순금이고 머리카락은 곱슬에 까마귀처럼 검다. 얼굴은 붉게 빛나고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고 입술은 몰약즙이 떨어지는 백합 같고 뺨은 향내 나는 꽃밭이다. 상체는 아로새긴 상아에 사파이어를 입힌 듯하고 다리는 황금 받침 위에 세운 대리석 기둥이고 팔은 감람석이 박힌 황금 막대기 같다."(5:10-15)

성경 어디에도 남자의 몸을 저렇게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표현하는 곳은 없다. 성경에도 미남(요셉·사울·다윗·압살롬·아도니야 등)이 많이 나오지만 이들의 외모를 서술하는 형용사는 막연하고 소박하다. 준수하다거나 빼어나다는 말이 전부고 부분적으로 키가 크다거나 눈이 아름답다는 정도의 묘사가 전부다. 화자인 남자들의 눈이 그런 수준이다. 반면에 술람미의 시선은 남자의 몸을 머리부터 발까지 세세하게 포착한다. 일반 문학에도 남자의 몸을 저렇게 내밀하고 적나라하게 응시하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아가서'의 저자는 여성이라는 주장이 이래서 나온다.

그런 아름다운 남자로부터 여자가 바라는 것이 정신적인 사랑만일까? 실상 여자가 찬미하는 것은 감각적인 사랑인바,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더 노골적으로 "나의 임은 잡목 속에 솟은 능금나무, 그 그늘 아래 뒹굴며 다디단 열매를 맛보고 싶다"라고 고백하기도 한다(2:3). 심지어 자신을 "가슴에 달고 다니는 인장처럼 간직해 달라'고 한다(8:6).

'아가'는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이고 표면적으로는 육신의 사랑을 노래한다. 물론 모든 감각적 언어를 정신적 언어로 승화시켜도 나쁠 것은 없다. 성관계를 인간과 신의 영적 결합으로 치환하고 보면 은혜롭다. 다만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빚어놓고 "보기에 심히 좋다"고 한 인간의 모습을 인간이 좋아하고 찬미하는 것을 그렇게 죄스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나중에는 신 자신이 스스로 육신이 되어 인간 속으로 들어왔는데 인간이 무슨 오만으로 육은 부정하고 영만 쫓겠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