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9>주막과 주막사이에서(하)

입력 2024-04-26 13:30:00 수정 2024-04-26 15:30:30

방천찌짐
방천찌짐

돈이 있어야 흥도 산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소시민에게 '유흥'(遊興)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대구는 그래도 형편이 괜찮았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적잖은 부자들이 도심지를 활보한 탓이다.

◆육군홀과 공군홀

대구의 모던한 유흥문화는 6·25 한국전쟁 때 본격화 된다. 당시는 '군인의 시대'. '군인사랑방'인 육군홀과 공군홀이 들어선다. 전쟁 때문에 육군본부와 국립극장이 잠시 대구로 피신한다. 흥미롭게도 전쟁은 낭만을 증폭시킨다. 전선에는 피바람이 불지만 후방인 대구에는 묘한 흥청거림이 있었다.

군인홀은 군인극장과 함께 한국 대중음악의 요람이었다. 육군홀은 대백프라자 신천 쪽 맞은편 수성2가에 있었다. 거기는 원래 '대구농원' 자리였다. UN군으로 진주한 KCOMZ(미후방기지사령부)가 여기를 주둔지로 만들면서 생겨난다. 남으로 피난 가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구 육군본부(달구벌대종 자리)를 방문했다가 숙소가 마땅치 않아 이 과수원 한켠에 양철로 된 미군클럽(일명 코리아 하우스)에서 잠시 머문다.

코리아 하우스는 뒷날 육본이 서울로 올라간 뒤 2군이 효목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2군홀'(일명 육군홀)로 사용된다. 박정희가 5·16을 성공한 뒤 2군사령부 장교 등과 가든파티를 연 곳도 바로 여기다. 60년대 후반 장원호텔 장원나이트와 TOTO 클럽으로 변했다가 장원탕으로 변한다.

대구초등 근처에 있었던 '공군홀'(일명 공군 구락부). 일본 사찰(천리교)을 매입, 공군을 위한 댄스홀로 개조된다. 한옥 스타일이었고 넓은 주차장도 구비돼 있었다. 작곡가 김희갑을 비롯, 조미미의 '서산 갯마을'을 작곡한 김학송, 예천 출신 색소포니스트 김상렬 등이 지나갔다. 이 홀은 60년대 경북씨름협회가 입주했다가 나중엔 분할 신축된다.

◆50년대 사랑방다방

오상순, 조지훈, 구상, 이중섭, 정비석, 최정희, 최태응, 신동집, 마해송, 오상순 등 기라성 같은 예인들이 포진한 피란지 대구. 문학은 낭만의 불쏘시개였다. 피란 문인들의 대표적 술집은 대충 이렇다. '감나무집'(초창기 영남일보 사옥 건너편 골목안)과 '석류나무집'(아카데미 극장과 대구백화점 사이), 향교 근처 말대가리집 등이었다. 술값은 당시 영남일보 편집국장이었던 구상 시인의 몫이었다.

재현된 카스바 주점
재현된 카스바 주점

낮의 아지트는 다방이었다. 다방으로 출근해 술집에서 밤을 적셨다. 밤의 술집은 단연 화전동 송죽극장 옆 골목에 있었던 '카스바'였다. 대구문학관 2층 향촌문화관에 그때 모습이 고증을 통해 재현해 놓았다.

1936년 화가 이인성이 다방 '아루스'를 오픈한다. 그 전통은 47년 1월 북성로 초입에서 오픈한 그 유명한 '백조 다방'으로 변주된다. 백조는 50~60년대를 주름잡은 사랑방다방 중 하나였다. 이를 필두로 모나미, 꽃자리, 청포도, 향촌동 골목에는 백록과 호수 등이 포진을 한다. 그리고 향촌동의 '녹향'과 '르네상스'가 국내 양대 음악감상실로 군림한다. 뒤를 이어 하이마트가 가세를 한다. 이중섭이 은지화를 그렸던 공간 중 하나도 녹향이다. 후에 음악감상실은 실버보다 청년의 숨결로 치장된다.

이후 홍선집, 찦차집, 향촌동 '고바우집', '가보세', '돌체'(옛 동문시장 뒷골목 안), '혹톨 쿠럽'(아카데미 극장에서 대구백화점 사이), '옥이집'(제일극장 맞은편 골목 안), '쉬어가는 집'(동아양봉원과 대백 사이), 뭉티기집인 너구리와 묵돌이, 로얄호텔 뒷골목과 아세아 극장 사이에 있었던 '새집'과 '새단골', 범어동 법원 맞은편 골목 안 '두레', 황금관광호텔 근처 '마메종'(후에 늘봄예식장 근처 '나무노래'로 바뀜) 등으로 옮겨간다.

기자와 교수, 예술가, 법조인이 함께 건배를 하던 시절이었다. 이들의 속풀이 해장국집은 청도집, 국일 등 따로국밥집, 복어탕은 남산동의 대하림, 이후 반월당 광성복어, 계산동 거창복어, 시청 옆 둥굴관 등이 거점이 된다.

◆곤도집과 미도다방

녹향이 탄생했던 향촌동 현대약국 옆 건물 2층에 일제강점기 일식당 출신이었던 '곤도'(近橙)집이 있었다. 일본식 초절임 요리인 '스모노'를 잘 했는데 곤도는 주인 권영도의 창씨개명된 이름이다. 많은 지역 문인이 거기서 낭만을 토로했다. 곤도집은 이후 향촌동 골목 안으로 이전했고 아내 이월분 여사가 2000년대 초까지 경영했다. 그 골목에 최근 전쟁문학관이 개관한다.

주류 수입 자유화 이전에는 주종이 다양할 수 없었다. 막걸리 아니면 정종이 전부였다. 60년대 후반 들면서 비어홀 붐으로 인해 맥주시대가 열리는데 이와 맞물린 기념비적인 가짜 위스키가 있다. 바로 '도라지위스키'. 50년대 초 일본 위스키업체 산토리가 만든 '토리스위스키'가 미군 PX를 통해 유통됐는데 이걸 카피한 부산 국제양조장이 1956년 '도리스위스키'로 출시한다. 이게 법적으로 문제가 돼 '도라지위스키'로 유통되면서 76년까지 살아남는다. 다방 마담이 레지로 통하던 시절, 모양만 신사인 사내들이 잠시 작업용으로 먹던 짝퉁 양주였다.

2010년을 넘어설 무렵 나는 도심 곳곳을 돌며 다방 전수조사를 해본 적이 있다. 지난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예스런 다방은 거의 전멸하고 고작 남산동 '고려다방'과 향촌동 '청자다방 '정도만 숨을 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정인숙 여사가 거북선처럼 거느리고 있는 종로 진골목 '미도다방'은 대표적 실버 다방이랄 수 있다. 붓글씨가 멸종가도를 걷고 있는 이 시절, 입구를 장승처럼 지키고 있는 입춘첩(立春帖), 그리고 전상렬 시인의 '미도 예찬' 시도 고향의 당산나무처럼 늘 정정하다.

◆ 주막사랑방 연대기

막걸리집은 주막의 연장이다. 한양으로 통하는 영남대로의 한 줄기가 팔조령을 넘어 국우터널 근처로 빠져나갈 때까지 여러 주막을 잉태한다. 팔조령에서 남문시장에 이르는 공간에 적잖은 주막이 있었다. 팔조령, 삼산리, 냉천, 파동, 상동, 용두방천 등에 포인트가 있었다.

80년대로 건너오면서 운동권 학생들이 단골로 가세한다. 단연 곡주사와 봉산동 학사주점, 공주식당 등이 주목받는다. 또한 행복‧은정‧밀밭식당은 반월당 3인방 실비집으로 각광받는다. 금동식 시인이 진을 쳤던 종로의 '무림주점'도 한 발언권을 가진다. 바로 옆 '정화식당'과 진골목 육개장의 전통이 스며든 '예전'이 버티고 서 있다. 그 흐름 속에 대봉동 LP카페 '마틸다'의 누님도 빛을 발한다. 원래 지금은 아파트 부지로 편입된 만리장성 옆 쌍목의 후신이다. 동성로 '늘봄'시리즈로 프리미엄 커피숍 시대를 연 박청강 여사가 오래 지켰던 봉산동 화방골목 내 '풀하우스'는 실버세대의 낭만이 촉촉한 경양식레스토랑의 종가랄 수 있다.

2010년을 넘어서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계산동 '바보주막', 그리고 방천시장 내 '동곡막걸리'와 '은자골탁배기', '방천찌짐', 수성구 지산동 '인사동' 등도 기억하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산동 도루묵으로 향했다.

도로메기 입구
도로메기 입구

◆ 남산동도루묵‧곡주사‧학사주점

지금은 이승에 없는 서금란 할매. 새하얀 피부, 잡티 없는 표정, 기품 있는 자태, 꼭 여느 문중의 종부를 연상시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탄 화덕 옆에 앉아 안주용 도루묵을 구웠다.

제일중학교 근처에서 움집 같은 막걸리집으로 시작해 올해 63년 역사를 가진 장수급 주막으로 명맥을 잇는다. 2004년쯤 근처로 이전한다. 모친의 가업을 딸이 이었다. 창업 때 사용한 솥뚜껑 불판은 가보로 아직 사용한다.

가장 인상적인 건 왕대폿잔. 예전 머슴들이 먹던 고봉밥 크기의 놋 잔이다. 한 잔에 1천800원이다. 배달된 통막걸리는 모두 술독에 붓는다. 숙성 때문이다. 여긴 혼술이 딱이다. 도루묵파는 '날구지'란 뜻을 안다. 날구지란 '궂은 날의 한잔'이란 의미. 다른 사랑방은 터줏대감이 있지만 여기는 다양한 단골이 몰려들어 독점할 수 없다.

운동권 막걸리집의 종가였던 반월당 '곡주사'(哭呪士). '통곡(哭)하고 유신을 저주(呪)하는 선비(士)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원래 대구 YMCA 소유의 건물이었다가 뒤에 신명여고에 넘어간다. 50년대 2층은 영어를 가르치던 강의실이었고 1층에는 그릇, 유기, 소쿠리 등 잡화를 파는 10개의 가게가 밀집해 있었다. 처음엔 술을 팔지 않는 칼국수 전문 '신진식당'으로 출발했다. 상주 출신인 정옥순 주모는 지역 대학 운동권 핵심 학생들의 대모격이었다. 박 대통령이 서거한 날 청와대는 초상집이었고 곡주사는 잔칫집이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양심수·장기수를 돕기 위한 일일주점까지 열었다.

지금은 증발해 버린 봉산동 학사주점 골목. 맨 처음 학사주점을 구상한 사람은 바로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된 영천 금호 출신 김종태였다. 그는 1960년대 초 서울 광화문 지하도 근처에서 1호점을 연다. 학생들이 벽에 맘껏 낙서할 수 있도록 해 훗날 술집 낙서문화의 선두주자가 된다. 김종태는 가끔 대구에 오면 꼭 봉산골목의 학사주점에 들렀다. 당시 이 집에는 지역의 4·19세대와 혁신·진보계 인사들이 손님으로 많이 찾았다. 통혁당 때문에 학사주점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 폐쇄된다. 술집 주인들은 중앙정보부 눈치를 보면서 학사 대신 '석사·박사'란 상호를 단다. 그러나 후에 중앙정보부는 술을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정권 유지 차원에서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학사주점을 허용하고 이때부터 전국에 학사주점 붐이 일어난다.

봉산동 학사주점 골목은 80년대에 들면서 밥주걱 메뉴판, 표주박, 장지문, 이엉을 인 칸막이, 달구지 바퀴 등 토속적 실내외 인테리어를 앞세운 민속주점가로 변한다. 일명 '찌짐골목'으로 전성기에는 25개 업소가 밀집한다.

행복식당 바로 옆 학사주점 골목을 혼자 걸었다. 학사주점은 이제 증발해버렸다. 장날과 동(洞)이란 술집만 보였다. 50년대 피란지의 골목만큼이나 퇴락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