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피땀 흘려 모은 44억원…11억원은 어디로 사라졌나
日, 대한제국 지배 강화 목적 1000만원 달하는 막대한 차관
이토 히로부미 주도 강제 도입
'내 손으로 나랏빚 갚자' 일어나…기생·나무꾼·인력거꾼도 모금
총 차관액의 1.5% 불과 역부족
베델·양기탁 기탁금 착복 의혹…외국인에 돈 빌려줘 원금 손실
열기 식고 표류하다 한일 병합…33억만 압수돼 11억 행방 묘연
대구 지역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이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과 국채보상로다. 유네스코는 국채보상운동이 국가적 위기에 자발적으로 대응하는 국민적 연대와 책임 의식에 기초한 경제모델이라며 2017년 이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출판사 겸 인쇄소인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이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20전씩을 내서 국채를 갚자"라면서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이렇게 시작된 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대체 대한제국은 어느 정도 외채를 안고 있었으며, 그러한 외채는 어떤 이유로 발생한 것일까? 1906년 대한제국의 세출액은 1,396만 3,000원, 1907년 대한제국의 외채 총액은 1,300만 원(현재 화폐 가치로 3,300억 원 정도)이었다. 외채 총액이 1년치 국가 예산과 비슷한 규모로 엄청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국사학자들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식민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외채를 강제 도입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시정 개선을 위해 일본에서 1,000만 원의 차관을 들여오는 바람에 외채가 폭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 통감은 대한제국의 연간 세입과 맞먹는 막대한 차관을 들여다 어디에 사용했는지를 살펴본다.
사료에 의하면 일본 차관은 화폐정리사업을 비롯하여 도로비(150만 원), 수도공사비(437만 원), 농공은행 설립비(80만 원), 학교신축 수리비(50만 원), 대한병원 신축비(28만 원) 등에 사용했다. 김상기(충남대 국사학과 교수)는 이런 용처에 대해 "일제의 침략 수단에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밝혔다(김상기, 「한말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와 이념」, 『충청문화연구』 Vol.10,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3).
◆일본 차관은 어디에 사용되었을까?
조선 및 대한제국 정부는 악화를 대대적으로 발행하여 화폐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져 이를 시급히 정리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판이었다. 도로는 말 한 필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원시 상태였다. 전염병이 돌면 백성은 떼죽음을 당했다. 특히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는 불결한 우물이 주범이어서 상수도 보급과 병원 건립은 무엇보다 시급한 핵심 과제였다.
통감부가 일본 차관을 들여와 집행한 사업은 화폐제도 건전화, 보건의료 위생시설 확충, 교육제도 개선, 도로 건설, 상수도 사업, 종자 개량, 산림녹화가 주를 이루었다. 대한제국이 통치기능을 상실한 와중에 비록 그 자금이 일본 차관이었고, 추진 주체가 통감부였지만, 사업 목적이나 성격은 이 나라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사업을 '일제의 침략 수단'으로 해석한 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다음으로, 짚어볼 문제는 국채보상운동이 어느 정도나 현실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국내 유통 화폐량 총액이 1,300만 원이었다. 이것을 일본 빚을 갚기 위해 동원하면 전국 화폐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대한매일신보에 기탁되는 하루 의연금 모집 액수로 계산하면 앞으로 60년을 더 걷어야 했다. 이것이 과연 지속 가능했을지는 좀 더 진지한 이성적 성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어쨌거나 '내 손으로 나랏빚을 갚자!'라는 애국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남자들은 금연과 금주로 돈을 모았고, 여자는 가락지와 비녀를 기증했으며, 여학생들은 머리를 잘라 마련한 돈을 쾌척했다. 노동자들은 품삯을 들고나왔고, 빈민층은 땔나무와 짚신을 팔아 돈을 마련했다.
평양 기생 31명이 의연금 32원을 기탁했고(황성신문, 1907년 3월 8일), 서울 인력거꾼 23명이 5월 75전을 냈으며, 걸인 도적들도 기부금 행렬에 동참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으로 혜택을 받았던 양반 관리나 명문가의 참여는 극히 저조했다(이상찬, 「국채보상운동과 IMF '금 모으기 운동'의 허구성」,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1998년 여름호, Vol.- No.43).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1907년 2월부터 5월까지 모금한 의연금 총액이 231만 989원(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965, 175~176쪽)으로 되어 있다. 정진석(한국외대 명예교수)은 『네 건의 역사드라마』란 저서에서 이 금액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정 교수의 책에는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하여 1908년 7월 27일 주한 일본 헌병대가 조사한 총모금액은 18만 7,787원 38전 7리(현재 화폐 가치로 44억 원 정도)로 조사되었다고 밝혔다. 차관 총액 1,300만 원의 1.5%에 불과했다.
성금 모집 과정에서도 온갖 해프닝이 연출됐다. 제국신문은 모금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문사를 부수겠다"고 협박당했고, 지방관이 향교에 지소를 설치하여 강제로 성금을 걷은 사례도 있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시들해진 이유
기세 좋게 진행되던 운동은 그해 말부터 급격히 추진 동력을 잃었다. 일부 국사학자들은 국채보상운동이 시들해진 이유는 통감부가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과 양기탁이 기탁금을 착복했다"라는 가짜 소문을 퍼뜨리는 등 방해 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베델의 기금 착복설은 일제가 창작해낸 근거 없는 낭설이었을까?
1908년 7월 통감부는 국채보상기금 횡령 혐의로 양기탁을 구속해 재판에 넘겼다. 재판 과정에서 영국인 베델이 독자들이 신문사에 맡긴 국채보상운동 기금을 전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고율의 이자를 조건으로 미국계 전기회사인 콜브란의 주식 매입, 서울에서 호텔을 운영하던 프랑스인 마르탱에게 자금을 빌려준 것이다.
백성들이 피처럼 모은 공금으로 고리대금업을 한 셈인데, 이자는커녕 원금 일부도 회수하지 못해 기금 횡령 의혹이 증폭되었다. 이 사건이 국채보상운동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것이 정진석 교수의 해석이다.
결국, 국채보상운동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면서 이미 모금한 성금 처리가 쟁점이 되었다. 1909년 11월, 국채 보상금 처리회가 결성되어 이미 모은 19만여 원(약 44억 원)의 성금으로 학교 설립안, 식산(殖産) 진흥안, 은행 설립안 등이 제기되었다. 어떤 결정도 못 하는 사이, 1910년 8월 한일 병합이 단행되었다.
문제의 성금은 합병 3개월 후인 1910년 12월 12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압수되었다. 그런데 압수된 액수가 13만 2,000원(약 33억 원)이었다(정진석, 『네 건의 역사드라마』, 소명출판, 2022, 416쪽). 2년 전 거둔 성금 액수가 19만여 원이었는데, 이 중 5만 8,000원 정도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전 국민의 피와 땀이 어린 이 돈은 대체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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