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사행길을 연구하고 그 역사적인 길을 따라 답사한 적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시행된 대일 외교사절 조선통신사가 12번이나 내왕했던 그 길이다. 문경새재에서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한 이후 1천300㎞의 바닷길을 건너 쓰시마와 오사카를 거쳐 동해도를 타고 도쿄에 이르는 여정이다. 전 구간을 모두 도보로 강행한 장도는 아니었지만 그 체감온도는 고온이었다.
내가 선 길 위로 조일 간 전쟁과 평화가 오고 간 얼룩진 한일 역사가 흘러갔다. 육로와 해로는 물론 국경을 넘어서기까지 사행길을 따라가는 사이 사뭇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하나의 화두가 있었다. 그것은 곧 길이다.
임란 당시, 부산에 도착한 왜군 제1진은 영남 중로를 택했다. 부산에서 양산-밀양-청도–대구-선산–상주-문경(새재)을 넘어 한양으로 나아가려 한 진격로였다. 전쟁을 겪으며 왜군에 맞섰던 선대들의 핏자국이 선연하게 남아 있는 그 길을 따라 어마어마한 규모의 외교사절단인 조신통신사 사행단은 임금의 국서를 교환한 뒤 귀로 길에 올랐다. 전쟁의 흔적을 뒤로하고 평화가 오고 간 공존의 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은 프랑스를 먼저 점령하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마저 자국의 손아귀에 넣을 것으로 판단했다. 유럽을 노리던 독일에 프랑스는 반드시 정복해야 할 중요한 길목이었다. 독일 군부는 독일과 벨기에 및 프랑스에 걸쳐 있는 아르덴느(Ardennes) 삼림을 눈여겨보았다.
험악하고 울창한 아르덴느 삼림지대는 고원지역인 데다 유속이 빠른 뮤즈강과 급격한 절벽이 가로막혀 있어 도하하기가 불가능한 지형이었다. 그 때문에 이곳 방어선은 허술했고 프랑스가 자랑하는 굳건한 마지노 지하 벙커마저도 이 지역엔 구축되지 않았다. 프랑스를 포함한 연합군은 독일군이 아르덴느 숲을 뚫고 기동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거기에 길이 있다고 본 독일군은 달랐다. 서부전선에 투입된 123개 사단을 앞세우고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통과한다. 1940년 5월 10일, 어두운 숲에서 수많은 독일군과 전차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독일군의 빠른 진격 앞에 프랑스군은 풀잎처럼 쓰러졌고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만다. 독일은 단 6주 만에 프랑스를 점령하게 된다.
아르덴느 삼림을 바라본 프랑스와 독일의 시선 차이가 빚어 놓은 결과다. 불가능하다고 본 일반의 시선을 넘어선 독일의 판단이었다. 전차나 차량은커녕 보병 부대의 이동도 쉽지 않았던 아르덴느 숲에서 독일군은 전차군단과 공군력을 집중 운용해 연합군의 주력을 단번에 포위 섬멸하고 전격전을 펼쳤던 사건이다.
길을 바라보는 눈은 다양하다. 만들어진 길을 단순히 걷기만 하는 길로 보는 눈이 있는가 하면 길 속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려는 창의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 있다. 세계가 얽혀 있는 이 시대는 사람과 사람, 물건과 물건의 교환뿐만 아니라 때로는 제3의 새로운 지대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그 길 위에, 한 걸음 더 새로운 가능성을 열려고 하는 역동적인 시도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수많은 전쟁사가 그리고 있듯이 전쟁은 언제나 길을 빼앗고 독차지하려는 데서 일어났다. 그러나 함께 나누어 쓰며 윈윈하겠다면 전쟁 대신 평화가 열린다. 전쟁과 평화가 모두 길 위에서 구현된다는 이야기다. 변화무쌍한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 그런 길을 지배하는 사람이나 민족이 전쟁도 평화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일 년 동안 내게 주어진 귀한 지면 '전쟁 톡톡'은 동서고금의 전쟁이 낳은 에피소드를 다뤘다. 스무 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 마치 꼬치어묵의 꼬치와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승자든 패자든 그들이 바라보고 걸어가고, 혹은 만들어 낸 전쟁의 길이다. 길을 간파한 전쟁 지도자와 그렇지 못한 지도자의 결과는 정반대로 갈렸다. 그러기에 길을 보는 눈은 전술 이상의 안목을 요구한다.
땅을 딛고 사는 한 우리는 길을 놓칠 수가 없다. 연일 뉴스가 끊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최근 북한 무인정찰기가 우리의 영공을 넘보는 일도, 그리고 전 세계가 우주를 향해 경쟁적으로 쏘아올리는 우주 로켓도, 그 모두 길을 막아서려거나 선점하려는 행동들이다. 지도자들은 주어진 길에 긴장의 끈만 당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는 안목으로 훈련되어야 한다.
사람이 길이고, 길이 또한 사람이다. 길을 따라서 삶의 행태가 바뀌고 문화가 달라진다. 또한 누가 어떤 생각으로 길을 내는가에 따라 전쟁과 평화가 엇갈린다. 전쟁도 평화도 모두 길 위의 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고 보면 길을 볼 줄 아는 사람만이 길 넘어 길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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