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오세혁 작·연출의 초기 작품 <늙은 소년들의 왕국>이 극단 걸판 20주년 기념공연으로 오는 3일부터 11일까지 대학로 공간아울극장으로 돌아온다. 리어왕과 돈키호테가 극중 인물로 등장하는 작품은 발상부터 놀이적이다. 영국과 스페인을 대표하는 작가 셰익스피어(1564-1616)와 세르반테스(1547-1616)는 동시대에 살았던 운명 같은 두 사람의 죽음을 작가는 놓치지 않으며, 놀이로 달리는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오세혁 연출 특유의 놀이적 상상력과 냉철한 현실을 응축하는 풍자극으로 블랙코미디다. 리어와 돈키호테라는 '몰락한 권력자'와 '이상주의 광인'을 통해 낭만과 현실, 몰락과 희망의 양가적 정서를 드러내며 더 이상 고전의 맥락에 머물지 않는다. 서울역 공간에서 부랑자들과 부딪히며, 정치인과 종교인, 자본가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의 기성 권력과 대면하게 되는 오세혁의 놀이 공간은 한국 사회의 계층 불평등의 구조적 병리를 압축시키는 공간의 은유로 전환된다.
극중 인물들의 냉혹한 현실은 리어와 돈키호테라는 환상의 인물을 통해, 권력의 희화화와 인간관계의 해체, 권력 구조의 분열과 붕괴로 현실에 침전(沈澱)된다. 연출은 이러한 시공간을'광야'로 재구성하며, 리어왕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소환해 한국 사회의 상징적인 도시 공간인 서울역 위에 박스 왕국을 세운다. 버려진 자, 소외된 자, 민중과 백성의 삶의 형상은 서울역 노숙자들의 언어와 몸짓으로 형상화된다. 리어왕은 몰락한 권력자이며, 돈키호테는 이상을 품은 방랑자다. 두 인물은 서울역이라는 '광야' 위에서 박스를 쌓아 왕국을 꿈꾸고, 연출은 고전 인물들을 한국 사회 하층의 상징적 공간에 던져 넣음으로써 웃음으로 뒤집는 잔혹한 현실 풍경을 배우들의 놀이정신과 박스 하나로 무대 위에 견고하게 세운다.

◆ 현실의 광야 위에 세워진 종이 박스의 왕국,'자본과 권력의 전쟁'
연극은 놀이의 미학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놀이는 <늙은 소년들의 왕국>에서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현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연극적 기제로 작용된다. 배우들은 소품이 아닌 신체와 언어를 통해 무대를 달리고, 무대장치는 덧마루와 박스, 신문지 정도로 극단화된다. 장치의 단순화는 배우의 역동적인 놀이성의 발화력을 전면화시키며, 극의 물질적 조건을 연극 자체의 언어로 전환하는 브레히트적 거리두기를 오세혁식 놀이성으로 변환한다. 감정의 이입보다는 놀이를 통한 전복적 시선, 사건의 연속성보다는 장면 단위의 충돌과 재구성을 통해 관객은 현실을 사유하게 된다. 2막 4장으로 구성된 작품은 프롤로그부터 가상의 현실 세계를 놀이로 건설한다. 백성을 위한 새로운 왕국, 서울역 부랑자들의 만남, 부랑자들과 두 노인의 대결과 한 소년이 구원의 설화적 인물로 등장한다. 소년을 위한 박스 왕국이 건설되고 백성을 위한 버스킹 공연도 펼쳐진다. 박스 왕국의 건설은 전쟁보다도 잔혹한 현실이다.
딸들에 의해 리어가 몰락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돈키호테의 구출 작전도 치열해지는 무대는 노숙자들의 장소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농축된 '현실의 극장'으로 전환된다. 리어는 새로운 왕국의 리더이자 대통령으로 치환되고, 돈키호테는 시민사회의 희망이 될판이다. 부랑자들은 소외된 민중, 시민 저항의 상징이 되고 소년은 악취 나는 세상을 구원하는 인물이다. 정치인과 자본가는 타락한 현실 세계의 인물이며, 리건과 거너릴은 공동체 사회의 붕괴를 상징하는 존재다. 리어는 가족에게 버림받은 왕이고, 돈키호테는 여전히 싸워야 할 정의를 찾아 헤매는 늙은 기사다. 이들이 살아가는 서울역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왕국이다. 돈키호테와 리어왕이 서울역 광장 모퉁이에 박스로 그들만의 왕국을 세운다. 박스 왕국 밖의 현실은 리어의 몰락보다 비극적이며, 돈키호테의 광기보다 더 희극적이다.

극중 리어의 대사다. "이제부터 이 박스가 우리들의 왕국이다. 우리들의 왕국은 작다. 그 어떤 누구도 침범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우리들의 왕국을 침범하려 든다면, 우리 백성을 괴롭히려 든다면, … 그 누구도, 그 누구도,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이들의 유일한 구원은 초코파이다. 서울역에 모인 종교인, 사이비 종교인, 야당 후보, 여당 후보, 자원봉사자, 진보 단체, 보수 단체 등은 달콤한 초코파이로 이들을 현혹하는 자본의 상징이다. 오세혁은 소년을 등장시킨다. 소년에게는 달콤한 초코파이도, 살아가는 기술도 필요 없다. 소년은 이러한 현실에 미소를 잃어가며 더욱 침묵한다. 소년을 대하는 부랑자들의 태도는 잔인한 현실의 축소판이다. 소년을 팔아 돈을 벌려는 부랑자들과 리어, 돈키호테의 극적 대립은 새로운 박스 왕국을 건설하는 유쾌한 전쟁놀이로 이어진다. 지팡이는 칼이 되고, 종이박스는 삶의 보호막이 된다. 배우들의 몸으로 막아서고 펼쳐지는 연기의 전투 태세는 웃음을 유발하는 유쾌한 놀이성으로 전환된다. 초코파이가 그리워질 때까지 밀어붙이는 포위 전술 놀이도 돈키호테와 리어의 자세를 무너뜨릴 수 없다. 박스로 세운 왕국의 유일한 백성은 소년 혼자다. 소수의 시민도 보듬는 박스 왕국이다. 돈키호테와 리어왕은 박스 왕국의 유일한 백성을 위해 옷을 벗어던지고, 굶주린 백성을 위해 거리 공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2막은 현실 세계다. 무대엔 허술한 박스 왕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윤 씨가 등장해 말한다. "1막에 적응이 좀 되나 싶었는데, 곧바로 2막으로 빠져드는군. 1막의 세계에 젖어 있던 우리들은 곧바로 다가오는 2막의 세계와 싸워야 한다. 2막은 대체 어떤 세계일까." 연출은 웃음의 속도를 높여 추악한 현실 세계를 놀이로 풍자한다. 연출의 시선은 비극이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춤을 추는 나레이터의 세계는 희극이 된다. 정치 유인물을 나눠주는 1인 시위자의 세계는 실험적인 연극으로, 사이비 종교 세계는 선동극으로, 노동자들의 세상은 잔혹극으로 그려진다. 리건과 거너릴의 욕망은 추악한 인간의 탐욕이다. 밥은 현실이고, 밥그릇의 쟁취는 냉혹한 자본주의다. 파리채는 무기가 되고, 분무기는 유일한 방어 수단이 된다. 시민이 원하는 박스 왕국의 쟁탈전은 놀이의 절정을 보여준다. 서울역 광장엔 이제 치열한 몸부림도, 희망의 박스 왕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꽃밭으로 덮인 광야의 땅은 절망의 나라이다. 그 위에 숨 쉴 수 없는 꽃들이 피고, 그 아래 묻힌 이들에게 물을 주는 사람도, 시선을 주는 인간도 없다. 평온한 일상만 존재한다. 리어와 돈키호테의 박스 왕국도, 희망을 품은 백성들도 광야의 땅에 소리 없이 묻혀 있을 뿐이다. 격한 사이렌 소리는 현실을 상징화한다. 침묵으로 일관한 소년의 분노는 괴성으로 터진다. 치장이 사라지고, 광야에 묻힌 인간의 마음을 품을 때 박스 왕국에 희망을 걸 수 있다는 태도다.

◆ 놀이의 미학, 극중 인물의 정치학
연극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미학은 '놀이성'이다. 단순한 장치나 연출적 기법이 아니라, 극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적·정서적 축이다. 오세혁은 리얼리즘이나 형식보다 놀이성을 통해 극의 논리를 구축하며 진행된다. 놀이의 규칙은 치열하다. 공간은 놀이성으로 채워지며, 몸의 움직임과 언어, 리듬과 속도로 박스 왕국의 공간을 점유한다. 리어와 돈키호테는 박스 왕국의 유일한 권력자이다. 백성을 위한다며 버스킹을 하고, 초코파이 한 개를 얻기 위해 몸을 낮춘다. 광대처럼 떠들며 박스 왕국을 수호하려 하지만, 권위는 자식과 현실에 의해 무너진다. 관객은 놀이가 허구임을 인식한 순간, 연극은 더욱 강렬한 현실 인식으로 전환된다. 극의 절정은 박스 왕국을 둘러싼 전쟁놀이에서 분화된다. 박스를 지키는 리어왕과 돈키호테 두 노인과 왕국을 부수려는 부랑자들, 그 사이에 등장하는 소년의 존재는 극의 상징적 구조를 선명하게 한다. 왕국의 유일한 백성인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시대의 강력한 상징이 된다. 소년은 초코파이에도, 밥그릇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극의 마지막, 소년이 밥그릇을 움켜쥐며 내뱉는 욕설은 저항의 언어다. 양극화된 자본과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현실의 질서에 순응할 수 없다는 선언으로, 소년의 등장과 박스 왕국의 몰락은 한국 사회의 전경과 현실정치를 베어내는 강력한 알레고리로 작동된다. 오세혁은 비극적인 현실을 희극으로, 다시 그 희극을 놀이로 변환하며 현실을 반추한다. 이러한 오세혁 표 구조는 웃음을 쉴 새 없이 유발하면서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현상을 사유(思惟)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박스 왕국이 무너진 폐허 위에 남은 것은, 침묵과 분노로 응축된 소년과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꽃밭이다. 종이박스로 성을 쌓고, 신문지를 덮으며 삶에 꿈을 꿨던 리어왕과 돈키호테 두 노인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이들이 건설하고 싶은 박스 왕국의 세계는 희망이 없기에,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 된다. 놀이로 시작한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희망하는 박스왕국은 무엇인가? 지킬 수 있는 용기가 당신에게 있는가?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유쾌하지만 무겁고, 희극적이면서도 진지한 연극이다. 오세혁은 희극이라는 장치를 빌려 가장 잔혹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놀이라는 형식을 통해 연극의 정치(사회)성과 극장 공간의 미학성을 연극적으로 구성하는 작품이 <늙은 소년들의 왕국>이다. 2014년도에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에 의해 초연된 작품으로, 오세혁을 작·연출로 알린 대표작품이다.
오세혁은 이 작품 외에도 <괴벨스 극장>(극단 파수꾼, 연출 이은준)을 통해 예술공간 혜화에서 공연되고 있으며, <단명소녀 투쟁기>(경기도극단, 연출 김광보)는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이 밖에도 재창작한 <킬링 시저>는 오는 7월 20일까지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 무대에 오르며, 제16회 서울연극제 공식 초청작인 <관저의 100시간>은 6월 20일부터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2025년 상반기에만 다섯 편의 작품이 무대화되고 있다. <늙은 소년들의 왕국>의 재공연은 시기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 12·3 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의 전환기를 지나, 제21대 대선을 앞두고 한국 사회가 극심한 분열의 정치적 역병을 겪으며, 정치적 혼돈과 사회적 피로가 격화되는 이 시점에, 작품은 초연 당시보다도 현재적이다. 도창선, 최현미 등 초연작품 배우들이 돌아온 <늙은 소년들의 왕국>을 만든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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