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일 경북대 행정대학원장
'전차 문제'(Trolley Problem)라는 것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당신이 전차를 운전하고 있다. 다섯 사람이 철로에서 작업 중이다. 전차를 멈추려고 하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한 사람이 옆 철로를 건너고 있다. 경로를 바꾸지 않으면 다섯 사람이 죽고 경로를 바꾸면 한 사람이 죽는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1명을 희생시켜 5명을 살려야 하는가. 5명이 죽더라도 1명을 희생시킬 수 없는가. 무엇이 옳은가. 이 지점에서 공리주의와 도덕적 의무주의가 대립하고 벤담(Bentham)과 칸트(Kant)가 소환된다.
실제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90%가 1명을 희생시켜서 5명을 살려야 한다고 대답했다. 설문을 조금 바꿔 보자. "당신이 경로를 바꾸면 5명이 살지만 당신의 애인이 죽는다." 1명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대답이 크게 감소했다. 그 1명이 애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윤리 의식은 선택적이다. 희생자가 남이면 공리주의자가 되지만, 희생자가 애인이면 도덕적 의무주의자로 변한다. 우리 내면에는 벤담과 칸트가 공존한다.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두 눈을 감고 저울과 칼을 쥐고 있다. 왜 눈을 감는가. 공정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몰라야 한다. 디케가 눈을 뜨면 저울이 망가지고 칼은 무뎌진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정의(正義)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롤스(Rawls)의 '정의론'이 인기다. 롤스 정의론의 핵심은 '무지(無知)의 장막(帳幕)'이다. 무지의 장막은 내가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내가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모르면 특정 계층에 유리한 제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가 공평하게 고려된다. 누가 사회적 약자인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적 약자인 경우를 가정하고 제도를 만든다. 그래야 안전하다. 그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의 효용을 가장 크게 하는 제도가 선택된다. 이를 '맥시민(Maximin) 원칙'이라고 한다. 무지의 장막은 사람들을 이타적으로 만든다.
인사청문회 때마다 부모 찬스가 논란이 됐다. 대학교 입학, 병역 면제, 취업 등에서 부모 찬스가 나타났다. 연예인도 운동선수도 부모 찬스를 쓴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부모가 스타면 각광(脚光)을 받는다. 부모의 후광(後光)이다. 이른바 재벌 2세나 3세는 부모 찬스의 끝이다. 재벌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능력이라는 농담도 있다. 부모 찬스는 미국도 심하다. 미국 대학교 입학지원서에는 부모 직업과 소득을 적는 항목이 있다. 오바마(Obama) 전 대통령 딸이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입학지원서에 아버지가 대통령이라고 썼을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부모 찬스를 쓰고 자식에게 부모 찬스를 준다. 태어나자마자 아이를 부모와 분리해서 국가가 양육하지 않는 한 자식이 부모 후광을 입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부모 찬스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자립준비청년'이 그들이다.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가 양육할 자격이 없는 '보호대상아동'은 만 18세 전까지 아동복지시설에서 보호를 받는다. 만 18세가 되면 이들은 자립준비청년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세상에 던져진다.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정부 지원은 자립지원금 800만 원, 5년간 매달 지급되는 자립수당 30만 원이 전부다.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정부 지원은 아무리 후해도 부족하다.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해서 최소한으로 지원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정의다. 내가 아는 사람이 이러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하고 지원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우리 앞에는 무지라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내 후손이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필요하다. 역지사지는 공감(共感)이다. 공감은 정의 실현의 필요조건이다. 롤스는 가장 가난한 사람의 효용이 곧 그 사회의 효용이라고 했다. 이 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2천 년 전 예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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