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종수] "면장님, 사람부터 살 수 있게 해 주이소"

입력 2026-08-04 14:40:20 수정 2026-08-04 16: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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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경북도 안전행정실장

김종수 경북도 안전행정실장
김종수 경북도 안전행정실장

"면장님, 법과 규정은 난 모르겠고 당장에 사람부터 살 수 있게 해 주이소."

1999년 전국 최연소 의성군 신평면장으로 첫 보직을 받았을 때 한 어르신이 내게 건넨 말이다. 처음에는 법을 어겨서라도 '해결해 달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러나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현장을 누비면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주민들이 바란 것은 특혜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며, 법과 제도 안에서 최선의 길을 찾아주는 공직자였다.

그 이후 나는 늘 마음속에 한 문장을 새겼다.

"행정(行政)은 인정(人情)이다."

인정은 원칙을 훼손하는 온정주의가 아니다. 법과 원칙은 엄정하게 지키되,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는 따뜻한 시선과 공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민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끝까지 경청하며, 제도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자세가 행정의 본질이라고 믿었다. 공정함과 따뜻함은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할 행정의 두 축이었다.

지난 30여 년 농업·보건복지·문화관광·자치행정·안전·지방의회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치며 이러한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FTA 개방으로 어려움을 겪던 농업 현장에서는 농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찾았고, 미국 투자통상주재관으로 근무하면서는 해외기업 투자유치와 지역 기업의 수출 확대를 위해 발로 뛰었다.

영천 부시장 시절에는 지역의 미래 성장동력을 고민했고, 문화관광 분야에서는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통해 경북을 세계와 연결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자 했다. 보건복지와 안전 분야에서는 도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고, 지방의회에서는 의원 한 분 한 분의 목소리 속에 담긴 주민들의 뜻을 행정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책은 책상에서 만들 수 있지만, 좋은 정책은 언제나 현장에서 완성됐다. 현장은 행정의 출발점이자 정책의 종착점이었다.

가장 공감했던 행정철학은 이철우 경상북도지사가 강조해 온 "답은 현장에 있다", 그리고 "출근하지 마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파격적으로 들렸지만, 그 뜻은 분명했다. 공무원의 진정한 출근지는 청사가 아니라 주민이 있는 현장이라는 의미였다. 보고서보다 주민의 목소리가 먼저이고, 책상보다 삶의 현장이 먼저라는 철학이었다.

중요한 정책일수록 현장에서 답을 찾았다. 주민의 목소리를 들을 때 문제의 본질이 보였고, 해결의 방향도 분명해졌다. 현장을 떠난 행정은 현실과 멀어지고, 주민과 함께하는 행정은 신뢰를 얻었다. 행정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문서를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주민의 삶을 변화시켰는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현장에서 배웠다.

행정은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 많은 업무는 기술이 대신할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희망을 전하는 일만큼은 기술이 대신할 수 없다. 행정의 중심은 시스템이 아니라 결국 사람이며,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을 향한 행정의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다.

후배 공직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법은 엄정하게 집행하되, 사람은 따뜻하게 대하라. 그리고 답은 언제나 현장에 있다."

공정함은 행정의 기본이고, 공감은 행정의 품격이다. 여기에 현장성이 더해질 때 비로소 주민은 행정을 신뢰한다.

30여 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며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은 결국 하나다. 행정은 '行政'이 아니라 '行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