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반 하곡 수집에 관하여 군정청에서는 개정방침을 단호 수행함에 있어 만일 할당 수량 수집에 각 군‧면장관이 실패하는 경우에는 파면시킬 것이며 그 정도가 심할 때는 체포까지 하고 맥류 수집에 경찰력을 사용하는데 협력치 않은 농부는 그가 보유하는 전수량을 몰수하고 농부까지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민들의 적극적 협력을 요망하고 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7월 7일 자)
경북도는 기아에 허덕이는 대구부민에게 해방 이듬해인 8월 중순부터 2홉씩의 식량을 배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눠줄 곡식이 없었다. 식량 사정은 어디나 빠듯했다. 미군정은 곡식 확보를 위해 하곡 수집(공출)에 나섰다. 곡식 수집이 미흡한 기관장은 파면하고 협조하지 않은 농민은 감옥에 보내겠다고 위협했다. 농민들은 빼앗기다시피 헐값에 곡식을 내놓았다. 일제시대 이상의 가혹한 방법으로 행해진 수집에는 경찰이 동원됐다. 경찰은 일제 순사처럼 무자비한 압박을 일삼았다. 순사는 최일선에서 주민과 부딪쳤던 일제 경찰의 가장 낮은 직급이었다.
해방 후에도 주민들이 일상에서 실감하는 변화는 더디기만 했다. 이를테면 교장, 면서기, 지서 주임 등은 여전히 동네에서 나름의 힘을 누렸다. 그중에도 일제 강점기 내내 완장으로 대표되었던 경찰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인들을 잡아들이고 핍박하던 일제 경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1947년 초에 남한의 경찰 숫자는 2만8천여 명이었다. 여기에는 일제 경찰이 다수 포함되었다. 해방되던 해에 6천5백여 명이 일본 경찰에서 조선 경찰로 옷을 바꿔 입은 상태였다. 일제 경찰의 악습이 고스란히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경찰의 악습이 해방 후에도 되풀이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경찰에 대한 분노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비화 되기도 했다. 해방 이듬해 2월 경북의 김천경찰서 사찰과장이 타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건의 범인은 22살 된 청년이었다. 금릉소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던 그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민족의식이 강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김천중학에 가려 했지만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교장이 소견서를 써주지 않아 진학이 좌절됐다.
중학교 진학이 좌절된 청년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공업학교에 들어갔다. 재학 중에 학생회와 독서회를 조직했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퇴학을 당했다. 그 뒤 일본의 모직공장 직공으로 들어가 공장폭격을 모의하는 중에 해방을 맞았다. 고향인 김천으로 돌아와 청년동맹 간부를 하면서 경찰의 횡포와 맞닥뜨렸다. 김천경찰서의 사찰과장은 일제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경찰이었다. 해방 후에도 고문 등 일본 순사처럼 조선인 핍박을 계속하는데 분을 참지 못하고 사건을 저질렀다.
해방 후에도 일제 경찰이 버리지 못한 악습 중의 하나가 고문이었다. 해방 직후 대구경찰서 부근에 가면 고문으로 인한 비명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경찰은 고문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모루히네' 중독자의 소리로 변명했다. 마약인 모르핀 중독자가 잡혀 왔으나 약물 투입이 없어 조사 도중에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안동에서도 경찰서 담벼락 밖으로 비명이 들리는 등 경찰의 고문은 어디서나 낯설지 않았다.
경찰은 또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다. 주로 사상적 활동이나 식량문제 비판의 경우 혐의만 의심되면 주민을 무작정 잡아들였다. 막무가내로 검거해 억지로 옭아매다 보니 유죄의 비율은 극히 낮았다. 경북 영주에서는 28명이 경찰에 검거됐으나 2개월 만에 전부 무죄로 풀려났다. 경주에서도 검거자 6명이 고초를 겪다 한 달 만에 석방됐다. 봉화에서는 경찰에 구속된 32명 중 6명, 포항에서는 35명 가운데 2명만 유죄를 받았다.
경찰은 죄 없는 주민을 잡아들인다는 비판에 어이없는 이유를 댔다. 유죄와 무죄는 재판소의 결정으로 경찰의 구금과 조사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죄를 씌우기 위해 무리한 먼지털이식 수사도 당연시했다. 또 40일로 정해진 유치 기간도 있으나 마나였다. 경찰이 불법을 저지른다는 지적이 나오자 신입 경찰로 화살을 돌렸다. 신입 경찰들이 법률을 몰라 법을 어길 수 있다고 발뺌했다. 그야말로 같잖은 변명이었다.
해방 이후에 주민들은 일제 경찰의 악습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조선인을 못살게 굴었던 일제 경찰도 청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주민들의 바람은 그야말로 바람에 그쳤다. 하곡 수집 현장에서 농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압 하는 데서 보듯 조선 경찰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에는 일제 경찰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악질 경찰을 처단해 달라'는 요구가 여론으로 표출됐을까. 일제 순사의 악습은 추억이 아니라 눈앞에 공포로 존재했다.
일제 경찰의 잔재는 그 뒤에도 한참이나 갔다. 견제를 받고 독점의 힘이 약해지면서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 다만 경찰의 무소불위 권력은 다른 주자로 배턴터치 됐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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