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창옥 경북대 교수
대구시는 '대구시민의 날'을 2월 21일로 정했다. 이날을 특정한 것은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대구 시민정신의 뿌리로 삼고 기억하고자 한 것이다.
이날을 좀 더 살펴보자. 1907년 1월 29일은 대구 광문사(廣文社·대구의 계몽운동 단체로서 경상감영 내 취고수청에 입주해 있었다)의 문회(文會) 총회가 열렸던 날이다. 이 총회에서 서상돈 선생이 담배 끊기 운동 방식으로 나랏빚 갚기를 제안했다. 이 제안을 실천한 날이 바로 2월 21일이다. 이날 정오쯤 서문시장 초입, 한 누각에서 '국채보상운동취지서'를 낭독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이 출발되었고, 들불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누각이 '북후정'(北堠亭)이다.
그렇다면 역사 현장인 북후정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인 현감 오횡묵의 '자인총쇄록'에 따르면 북후정은 대구읍성 달서문 밖, 서문시장 초입에 있었다. 당시의 지번으로 '시장북통 22번지'였다. 또 북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마루의 팔작지붕으로 정면이 서문시장을 향해 있는 누각이었다. 그런데 이 누각이 1910년쯤 사진부터 모습을 감춘 것을 보면, 대구읍성이 헐릴 즈음 멸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로 인해 여러 연구논문과 '대구시사(市史)'에는 북후정의 '北'자 때문인지 '서문 밖'을 '북문 밖'으로 거듭 오기했고, 결국 북후정 위치가 북문 밖 대구시민회관 주변으로 잘못 설정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대구상공회의소도 시민회관 앞에 국채보상운동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고,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지역 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OW)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북후정의 위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옛 북후정 터' 동판을 심어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보훈청은 위치가 잘못 설정된 시민회관 앞 국채보상운동기념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으니, 역사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문제는 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작년부터 북후정 터 주변이 재개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 북후정이 서 있어야 할 자기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대구시가 모름지기 북후정에서 출발한 국난 극복 책임정신을 대구의 시민정신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면서, 그 역사 현장을 방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대구에서 중요한 역사 현장이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사례는 처음이 아니다. 대구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을 망우당공원 절벽 위에다 복원한 바 있다.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던 '관풍루'도 달성공원 안의 한 정자처럼 이전 복원해 두고 있다.(곧 제자리를 찾겠지만) 심지어 '2·28 학생의거기념탑'도 교통상의 이유로 명덕네거리에서 두류공원으로 밀어냈다. 이러한 실행은 역사 현장이 뿜어내는 정신을 경시하는 처사이며, 그 현장성을 공원 한 모퉁이에 박제해 둔 것이나 다름없다.
대구 정신의 공간적 근간인 '북후정'마저 자기 자리를 잃고 떠돌다가 또 어느 공원 한 모퉁이에 웅크려 있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구를 넘어 한국 시민운동의 출발점인 '북후정'은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어 역사 계승의 정당성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국채보상운동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도록 '북후정'은 당당하게 그 역사 현장을 지키며 서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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