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김민성(시너지 대표) 씨 할머니 故 전말순 씨

입력 2021-12-26 14:24:39 수정 2021-12-26 17:37:39

아버지 사업 실패로 온 가족이 의성에 왔을 때 따뜻하게 품어주셨죠
행사장에서 트로트를 들으며 좋아하시는 할머니 보면 더 생각납니다

가족여행에서 승마를 하고 있는 할머니 전말순 씨 생전모습. 가족제공.
가족여행에서 승마를 하고 있는 할머니 전말순 씨 생전모습. 가족제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온 가족이 의성에 오게 되었을 때, 따뜻하게 품어주신 할머니의 마음을 모른 채 5살 어린 아이에게 여장부셨던 할머니는 그저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손자를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표현에 서툴러 말을 안 들으면 고추장을 손에 찍어 입에 바르시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미워 포크레인 기사를 하시던 아버지에게 할머니를 포크레인 바가지로 떠서 멀리 보내달라던 저의 어리광 시절이 아직도 생각나 지금도 웃음 짓곤 합니다.

저는 할머니와 약 10년을 같이 살면서 왜 그렇게 할머니가 어려웠을까요. '할머니 진지 드세요!', '다녀왔습니다.'라는 일상적인 대화 외에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2008년 12월 19일 금요일 이후부터 할머니와 저는 지난 8년간 해온 말들보다 불과 2달의 그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서로 의지를 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바로 아버지의 교통사고가 나신 날입니다.

평소 학교를 마치면 늘 데리러 오시던 부모님께서 데리러 오시지 않았고, 집에 도착하니 할머니 혼자 계셨습니다. 제가 부모님을 찾자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저에게 전하셨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괜찮다며 저를 달래주셨고 그날 제가 잠들기까지 제 옆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크게 다치셔서 부모님의 병원 생활이 길어지셨고, 저는 매일 아침, 저녁 식사를 할머니와 함께하였습니다.

지난 8년간 할머니와 단둘이 있어 본 적도 없는 저에게 그 시간은 어색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할머니는 어떠셨을까요. 중환자실에 있는 아들 걱정은 물론이고, 평소에 요리 한 번 제대로 안 해보셨던 할머니께서 핏덩이 같은 손자의 두 끼를 책임지셔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저처럼 얼마나 어색하셨을까요.

할머니 전말순 씨가 큰아버지 부부와 찍은 기념사진. 가족제공.
할머니 전말순 씨가 큰아버지 부부와 찍은 기념사진. 가족제공.

그래도 매번 식사할 때마다 어색하지만 손자와 대화하기 위해 대화 주제를 가져오시는 할머니의 용기가, 요리를 잘 못하시지만 어떻게든 하시려는 할머니의 그 모습이 어린 제 눈에도 그저 감사했습니다. 식용유와 식초가 비슷하게 생겨서 식초로 해주신 계란후라이는 아직도 가족들이 모였을 때마다 자랑하곤 합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식초 계란후라이를 먹어본 사람 있으시냐고 말입니다.

할머니 덕분에 중1 사춘기 소년은 자칫 방황할 수 있었던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했고, 아버지 역시 건강을 회복하시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할머니와는 다시 서먹해졌고, 서로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던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폐암으로 병원에서 투병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비록 할머니와 어색했지만 저는 전에 할머니가 저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용기를 내서 오늘은 어떤 대화를 할지, 대화 주제를 가지고 학교를 마치면 매일 할머니 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몸도 잘 못 일으키시고 기침 때문에 말도 못 하시던 할머니는 제가 오면 늘 앉아서 최선을 다해 저랑 대화를 해주셨습니다. 할머니도 아셨겠죠. 이 어린 손자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비록 지금은 할머니가 옆에 계시지 않지만 저는 서로의 용기가 할머니와 제 사이의 추억을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남들처럼 할매,할매, 우리 손주하며 지내진 못했지만, 각자의 방식대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 우리. 조금 더 살가운 손자가 되지 못한 것이 아쉽고 후회가 많이 됩니다. 지금 계셨더라면 우리 할머니 매일 업고 다닐 자신도 있는데…

5살 그 어린 나이에 무서운 할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할머니가 좋아하던 트로트를 연습하던 저는 아직도 트로트를 들으면 할머니 생각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산소에서 제가 하는 말 들으셨죠? 손자는 지금 행사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좋은데도 많이 다니고 좋은 것도 많이 보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끔 행사장에 트로트를 들으며 좋아하시는 할머니들을 보면 할머니가 더욱 많이 보고 싶습니다. 일하면서도 할머니가 생각나면 저 할머니 진짜 좋아하는 거 맞죠?

할머니, 하늘에서 잘 지내고 계시죠? 그리고 우리 가족 잘 지켜보고 계시죠? 할머니께 못 드렸던 사랑, 제가 우리 가족들에게 할머니 몫까지 꼭 다 드리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정말 부끄럽게도 제가 한 번도 할머니께 해보지 못한 말이지만 이 기회가 아니면 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싶어 다시 한번 손자가 용기 내봅니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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