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 시인…와불의 평온 깃든, 세계서 가장 긴 이름의 도시
"도를 믿으십니까" 또는 "종교가 뭡니까"라는 질문에 내 대답은 한결같다.
"전 다신교도(多神敎徒)예요. 해도 믿고, 달도 믿고, 꽃과 돌 그리고 별과 나무도 믿는답니다. 그래서 가끔 세 곳의 절을 하루에 들러보기도 하고, 처음 가본 도시의 성당 한편에서 누군가의 쾌유를 빌며, 토속신앙 발현지나 영험하다는 바위에선 하늘을 향해 팔을 들어올리기도 해요. 또 소원을 이뤄준다는 성인(聖人) 조각상의 반들반들한 발등도 만지고, 불을 숭배하는 어느 사원에선 몇천 년 꺼지지 않았다는 불 위를 휙휙 뛰어넘기도 했어요."
방콕 왓포 사원의 거대한 황금 와불(臥佛) 앞에 섰을 때도 '오늘은 저 부처님께 마음이나 기대고 가야겠구나'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길이 46m, 높이 15m 팔을 괴고 누워 계신 부처의 발바닥에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새겨진 108개 길상 문양은 공항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이 나라 사람들 표정처럼 평온했다.
태국은 비교적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곳이라 친구나 가족들과 가볍게 짧은 여행만 몇 번 했다. 6·25 당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군인 1만 명을 파병해 준 혈맹국, 전체 인구의 95%가 상좌부 불교(테라와다 불교) 신자라는 것, 무에타이 원조국이라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던 짧은 지식도 그 맥락 정도였다.
하지만 종교뿐 아니라 모든 예술, 특히 문학에서 영혼이라든지 만물을 신성 같은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스스로 믿는 나는 어느 지면(紙面)에서 이 시를 접했을 때 생각이 바뀌었다.
'설령 대지가 무너지고/ 하늘과 대양이 끝날지라도//
그대를 향한 내 결속의 사랑은 끝나지 않으리//
이 세상 아래 어느 대지와 강가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어김없이 그대를 만나 다시 사랑하기를 소망하노라'
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순툰 푸의 산스크리트어 의미가 담긴 시 '용서의 보석'이었다. 교과서에도 실린 무력 대신 마법의 피리 소리로 적을 잠재워버리는 오르페우스 형(形) 왕자의 민족 대서사시라고 했다. 이 나라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시암, 타이, 동남아시아의 맹주국
태국(泰國, Kingdom of Thailand)은 동양에선 보기 드문 입헌군주제 국가다. 옛 이름은 시암(Siam·1856∼1939), 국민의 75%가 타이인이며 14%는 중국인이다. 그 외 라오족, 크메르인, 말레이인, 카렌족, 세망족, 라와족과 이주민인 수에이족, 인도인을 비롯해 1980년대 중반까지 38만 명가량 유입된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난민들 등 수많은 민족들이 함께 살고 있다.
1220년 수코타이 왕조에서 아유타야, 톤부리 왕조를 거쳐 1782년 개창한 짜그리 왕조의 라마 1세가 방콕으로 수도를 옮겼고 현재는 라마 10세 국왕(와치랄롱꼰)이 다스리고 있다. 서구화의 필요성을 절감해 서쪽의 영국(영국령 인도 제국)과 동쪽의 프랑스(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대나무 외교로 상당한 영토를 열강에 넘겨주는 대신 시암의 독립을 지킨 라마 5세와 현 국왕의 아버지인 라마 9세(푸미폰)는 온 국민들이 '대왕'으로 추앙하는 국왕이었다.
사실 나는 태국과 인도, 아라비아조차 구분 못 했던 어린 시절 흑백TV에서 영화 '왕과 나'를 보며 시암 왕국을 처음 접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주인공 율브리너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태생이며, 1944년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마거릿 랜든의 원작 소설이 살짝 창작자의 주관적 당의정(糖衣錠)이 입혀졌다더란 것이 밝혀진 것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그에 더해 영화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안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해 태국에서 추앙받는 라마 4세 몽쿠트를 희화화하고 역사 왜곡을 했다는 것에 태국 국민들의 공분을 사 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개봉 금지라 한다. 195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시작해 영화의 고전이 된 '왕과 나'자료를 보다가 알게 된 사금(砂金) 같은 정보 하나. 블라디보스토크 태생 율브리너가 1920년대 집안의 광산사업과 벌목업으로 어린 시절 몇 해 여름을 우리나라 함경도에서 보낸 기록과 사진을 찾았다는 것.
태국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방에 있던 속국을 프랑스에 양도했으며, 1917년 연합국 편에 가담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 후 라마 7세 시대에 쿠데타로 입헌군주제 정부가 세워졌으며 1939년 국가의 공식 명칭을 시암에서 타이로 바꾸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마지못해 일본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전후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잇달아 국가 안보가 위협받게 되자 군부의 지배와 그 영향을 강하게 받는 정부가 잇달아 들어서지만 국민에게 절대적 존경을 받았던 라마 9세(푸미폰 국왕)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고 왕실 모독죄는 지금도 중형으로 적용된다.
◆열심히 일한 당신에게 주어진 즐길 권리
방콕은 세계에서 가장 이름이 긴 도시다. '끄룽 텝 마하나콘 아몬 라따나꼬신 마힌타라 유타야 마하딜록 폽 노파랏 랏차타니 부리롬 우돔 랏차니웻 마하사탄 아몬 피만 아와딴 사팃 사카타띠야 윗사누깜 쁘라싯(천신(天神)의 도시, 위대한 도성, 불멸의 보석(에메랄드 불상)의 땅, 위대한 인드라 신의 난공불락의 도시, 아홉 가지 보석을 지닌 장엄한 세상이자 왕국의 즐거운 수도, 풍요로운 왕궁이 자리한 곳, 신이 현신하여 머무는 천상의 궁전, 건축의 신(비슈바카르만)의 명을 받아 인드라 신이 세운 도시)' 라마 1세 시절에 처음 확립되었고 라마 4세가 일부 수정했고,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어 있다.
방콕은 세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다. 유럽과 남아시아, 중동과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와 동북아시아를 잇는 길목에 있어 여러 도시를 경유해 겅충겅충 뛰어다닌다는 캥거루 루트로도 불린다. 차오프라야 강변에는 수많은 대형 쇼핑몰과 방콕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크메르 풍의 새벽사원 왓 아룬 사원이 있다. 불교의 수미산, 제석천, 도리천, 선견성을 상징하는 화려한 외형과 야경은 바라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로열 시티(royal city)에는 옛 왕들이 살았던 그랜드 팰리스(grand palace), 왓 포, 왓 프라깨오를 비롯한 다양한 사원들이 있다. 1901년 완공된 비만멕 궁전은 라마 5세가 직접 거주했던 곳으로 세계 최대 티크 목조 건물로 '구름 위의 집' 이란 뜻을 갖고 있다. 총 3층 건물에 81개의 방에는 유럽이나 아시아 각국에서 선물로 보내온 가구와 장식품, 도자기들로 전시되어 있었다.
아난다 사마콤 궁전은 태국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라마 5세 출라롱콘대왕 시절 영빈관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태리 르네상스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동양의 베르사유궁전이라 불린다고 했다. 아, 태국의 왕궁과 사원에서는 민소매 옷이나 반바지, 미니 스커트, 슬리퍼,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왕궁과 사원 입장이 거의 불가하다. 여성은 무조건 무릎 길이 이상의 치마, 남자는 무조건 긴바지를 입어야 한다.
지난 여름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의 '태국 미술 명품전 –어메이징 타일랜드'에서 본 태국의 불교미술, 자기 및 도기 공예품들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기억이 있다. 특히 방콕 현지에서 본 불상들과 달리 굽타미술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초기 불상들을 볼 수 있어 더 좋았던 것 같다. 방콕에서는 왕궁과 사원 그리고 시장을 주로 다녔다.
방콕은 사바나 기후로 1년 내내 덥고 습하다. 담넌싸두억 수상시장엔 온갖 것들을 싣고 운하 위를 오가는 작은 배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알록달록 각 지방 특산물을 파는 작은 선물가게와 달콤한 간식들을 보노라면 '열심히 일한 당신, 흥겨워라'란 구호를 만끽한다는 느낌이 절로 난다. 좀 비싸게 런치 크루즈를 타고 차오프라야 강변의 진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요즘은 치안이나 물가 걱정을 많이 하게 되지만 처음 갔을 땐 유럽이나 일본 등지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격으로 초특급 호텔을 사용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세계 다양한 종류의 아기 호랑이를 볼 수 있고 다소 냄새가 역겨웠지만 호랑이쇼, 돼지 달리기쇼, 악어쇼, 사자, 원숭이, 곰 등 조련되어 있는 동물들을 본 호랑이공원에서 코끼리를 타고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문학적이게도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애러비'가 떠올랐다. 밤늦게 놀이공원에 도착한 소년의 비애처럼 뭐랄까. 나는 너무 늦게 놀이를 알게 된 것이다. 열대밀림 야자수 농장에서 잘라주는 파인애플, 망고, 두리안에선 때늦어 농익은 과육 냄새들이 온 공기를 휩싸고 있었다.
어쨌든 방콕은 신나는 관광지였다. 9천800평의 대지, 세계에서 가장 큰 식당 로얄 드래곤에서, 5천 명이 거대한 인공호숫가에서 중국 고대 건축문화를 감상하며 식사를 한 것도 놀랍고 '플라잉 서빙쇼'를 비롯한 온갖 쇼와, 시내 허름한 재래시장 한쪽 링에서 무에타이를 관람한 것은 더욱 놀라웠다. 링을 돌며 머리띠(몽콘)와 팔띠(프라진)를 하고 춤을 추던 청년들이 상대방 펀치에 따라 시시각각 야수처럼 변해가는 사각 링이라니. 영화나 드라마 또는 중계로 보는 권투 경기 정도나 곁눈질로 봤던 내게는 실제 경기 관람은 그야말로 섬찟한 충격이었다.
파타야의 푸르고 얕은 수심은 그 무에타이 경기에 놀란 마음을 다독여주기에 충분했다. 산호초 감상이 용이해 산호섬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꼬란에서 해수욕을 하다가 들른 테마파크 농눅 빌리지 또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소철과 선인장, 난초와 고사리 향이 그윽한 곳을 또 빠져나와 즐긴 야간 시티투어 또한 흥겹기 짝이 없었다. 그중에서도 요즘 파리 에펠탑 아래 아프리칸 파리지엥 파코씨의 원조격이랄까 '강원도 찰강냉이'를 차지게 외치며 찐 옥수수를 팔던 그 아저씨가 잊히질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가보진 못했지만 조만간 짬을 내어 방콕 여행을 갈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 본다. 11월부터 2월까지 건기(乾期)이니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다. 이번에도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직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왓 포 사원의 와불을 뵙고, 차오프라야 강가의 수많은 아름다운 건축물들 다시 들러보고 싶다.
그리고 지난해 개관했다는 태국 최초의 방콕현대미술관(Dib Bangkok)을 필히 가보고 싶다. 태국 거대 통신사 오너이자 미술품 컬렉터로 알려진 푸랏 창 오사타누그라(Purat Chang Osathanugrah)가 세운 사립미술관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나는 뜬금없이 부자가 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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