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 켜자 '펑'… 시공사·보일러사·가스사, 다 남 탓이었다"

입력 2026-11-04 09: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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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신축 대단지 입주 첫 겨울, 연통 폭발음·가스냄새에 떨었지만 하자 책임 묻자 '핑퐁'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창문을 다 열어놓고 가족들 데리고 복도로 나갔어요. 그날 밤 집에서 못 잤습니다."

대구 한 신축 대단지 아파트에 올해 입주한 이모(34)씨는 지난 3일 저녁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기온이 뚝 떨어진 이날 저녁, 이씨는 입주 뒤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다. 몇 초 뒤 베란다 쪽 연통에서 '펑' 하는 폭발음이 났다. 곧 집 안에 가스 냄새가 번졌다.

이씨는 보일러 전원을 끄고 가스 중간밸브를 잠근 뒤 창문을 모두 열었다. 가족과 함께 집 밖으로 나와 도시가스사와 한국가스안전공사에 신고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우리 소관 아닙니다"

이씨에 따르면 처음 전화한 관리사무소는 "보일러 제조사 AS를 부르라"고 했다. 보일러 제조사 기사는 현장을 보고 "기기 결함이 아니라 연통 쪽 문제"라며 설치업체로 돌렸다. 설치업체는 시공사 하도급이었고, 시공사 하자보수 담당은 "보일러와 연통은 설비 업체 소관"이라고 답했다.

며칠 사이 이씨가 전화를 건 곳은 관리사무소, 보일러 제조사, 설치업체, 시공사, 도시가스사까지 다섯 곳. 책임을 인정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다 자기네 책임이 아니라는데, 그럼 우리 집 보일러는 누가 터뜨린 겁니까." 이씨의 말이다.

◆ 연통은 '보일러'인가 '건물'인가

업체들이 서로 책임을 미루는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가스보일러 본체는 제조사가 책임지지만, 연통(급배기관)은 아파트 시공 과정에서 설비 하도급 업체가 설치한다. 본체는 '제품', 연통은 '공사'로 나뉘는 셈이다.

신축 아파트의 경우 연통 이음부 체결 불량, 외벽 배기구에 씌운 보호캡 미제거, 공사 잔재물 유입 같은 시공 단계의 문제가 입주 첫 겨울 첫 가동 때 한꺼번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구간을 실제로 들여다보는 검사 단계가 사실상 없다. 준공검사는 건축물 전체를 보고, 도시가스 공급 전 안전점검은 가스 배관과 연소기 접속부를 보지만, 연통 끝까지 확인하는 절차는 어느 쪽에도 명확히 규정돼 있지 않다.

가스안전 분야 한 전문가는 "지연 착화는 점화 전에 연소실에 가스가 고였다가 한꺼번에 불이 붙는 현상으로, 이때 생기는 압력으로 연통 이음부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벌어진 틈으로 배기가스가 실내로 들어오면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어 폭발음 자체보다 그 뒤가 더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는 "신축 아파트는 연통을 설비 하도급이 시공하고 보일러는 입주 직전에 설치되는 구조라 두 공정 사이 접점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며 "입주 첫 가동 전 연통 체결 상태와 외부 배기구 막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준공 단계에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입주민이 할 수 있는 건 '기록'뿐

이씨는 한국가스안전공사 점검 결과를 문서로 받아두고, 각 업체와 통화한 날짜와 내용을 모두 적어뒀다. 하자 분쟁이 길어질 경우 근거로 쓰기 위해서다.

가정용 가스보일러 사고 가운데 상당수는 겨울철 첫 가동 시기에 집중된다. 시설 미비나 설치 불량이 원인인 사고의 피해자는 입주민인데도, 책임 소재를 가리는 몫은 고스란히 입주민에게 떨어진다. 같은 단지, 같은 시기에 지어진 다른 단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하자 분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 "터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소리 안 나고 가스만 조용히 새어 들어왔으면 우리 가족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