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생 17명 포항 기북초 6학년생들 편지 "영화 한 편 보려면 시내까지 차로 40분"…'어린이 문화패스' 등 정책 제안
인구 1200명대·평균연령 64세 넘는 농촌…"교과서 그림·오케스트라 직접 보고 듣고 싶어"
지난 어린이날 대통령 '영상 답장' 보고 편지 결심…李 "문화생활 쉽게 즐길 방법 꼭 찾겠다"
"시골 어린이에게는 표를 사는 것보다 그곳까지 가는 길이 더 어려워요."
경북 포항의 작은 농촌학교 어린이들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보낸 손편지에는 단순히 "영화관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만 담겨 있지 않았다.
도시와 멀리 떨어진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 문화패스'를 만들고, 그 패스로 교통비까지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작은 학교에서는 여러 학생의 패스를 모아 버스를 빌려 함께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찾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꽤 구체적인 정책 제안이 담겼다.
이재명 대통령은 2일 오후 3시 31분쯤 X(엑스, 구 트위터)에 이들의 편지에 직접 답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포항 기북초등학교 6학년 예림, 예서, 도현, 지아, 하윤 학생 안녕하세요. 대통령 할아버지예요"라며 "동네에 영화관도, 공연장도, 미술관도 없다는 편지 잘 받았다"고 적었다.
이어 "'우리 학교는 작지만, 우리가 보고 싶은 세상까지 작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며 "거리가 멀어 문화생활이 어려운 친구들도 쉽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방법을 꼭 찾아보겠다. 아이디어 고맙다"고 답했다.
◆'어린이 문화패스' 만들어 달라…교통비까지 구체적 제안
학생들의 편지는 모두 3장 분량이다.
기북초 6학년 학생들은 우선 정부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문화예술패스를 사례로 언급했다. 올해 19~20세 청년들이 문화예술패스를 받을 수 있고,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사는 청년에게는 더 많은 지원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사는 곳에 따라 문화를 누리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라도 알고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 생각을 농촌 어린이에게도 적용해달라고 제안했다.
첫번째는 "우리처럼 문화시설에서 멀리 사는 어린이에게 '어린이 문화패스'를 만들어 주세요"였다. 학생들은 집과 영화관의 거리에 관계없이 1년에 몇 번은 공연과 전시,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번째는 교통비다. 학생들은 "그 패스로 오가는 차비도 낼 수 있게 해 주세요"라며 "시골 어린이에게는 표를 사는 것보다 그곳까지 가는 길이 더 어려워요"라고 이유도 명확히 적었다.
문화예술 관람료를 지원해도 영화관이나 공연장까지 갈 교통수단이 없다면 농촌 어린이에게는 실질적인 문화 접근권이 생기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올 만한 부분이다.
◆전교생 17명…"패스 모아 버스 빌려 미술관 가게 해주세요"
세번째 제안은 작은 농촌학교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기북초 학생들은 "친구들과 함께 쓸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다.
기북초 전교생은 학생들 편지에 따르면 17명이다. 아이들은 "우리 학교는 전교생 17명인 작은 학교"라며 17명의 패스를 모을 수 있다면 버스를 빌려 다 같이 미술관에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인별 지원금을 지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구가 적은 농촌학교에서는 지원금을 묶어 단체 문화체험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아이디어다.
학생들이 보고 싶다고 한 것도 거창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저는 교과서에서만 본 그림을 진짜로 보고 싶어요. 화면으로만 듣던 오케스트라 소리를 공연장에서 듣고 싶어요"라고 이유를 들었다.
이어 이번 편지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인용한 문장이 등장한다.
"우리 학교는 작지만, 우리가 보고 싶은 세상까지 작지는 않아요."
◆인구 1200명대 기북면…평균연령 64세 넘어
기북초가 있는 포항시 북구 기북면의 인구구조를 보면 아이들의 요구가 나온 배경이 짐작된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를 바탕으로 한 2026년 8월 자료에서 기북면 인구는 1278명에 불과하다. 평균연령은 64.7세. 65세 이상 인구는 742명으로 전체의 약 58%를 차지한다. 반면 7~18세 학령기 인구는 28명 정도다.
포항 북구 전체 평균연령이 46세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 기북면은 평균연령이 18세가량 높다. 한 면 전체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찾아보기 어려운 인구구조인 셈이다.
편지에도 이런 지역 현실이 그대로 묻어난다. 아이들은 "우리 기북면에는 1282명이 산다"며 "면에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가 64살이 넘을 만큼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은 조용한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영화 한 편 보려면 시내까지 차로 40분"
아이들에게 문제는 단순히 '시설 숫자'가 아니었다.
기북면에는 영화관도 공연장도 미술관도 없다면서 "영화 한 편을 보려면 시내까지 차로 40분, 버스로 1시간을 가야 한다"고 적었다. 도시 어린이라면 학교를 마친 뒤 부모와 영화관이나 전시장을 찾는 평범한 일이 농촌 어린이에게는 교통편부터 해결해야 하는 일이 되는 셈이다.
학생들은 특히 선생님에게 '문화누리카드'가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거리였다. 지원할 돈이 있어도 실제로 사용할 문화시설까지 이동하기 어렵다면 혜택을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누리지 못하는 상대적 박탈감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제시한 '어린이 문화패스+교통비+단체사용'은 농어산촌 문화정책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돼온 '지원금은 있어도 이용할 시설과 교통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어린이들의 언어로 풀어낸 제안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쓰게 된 계기도 눈길을 끈다.
편지에는 지난 어린이날 이재명 대통령이 어린이들이 보낸 메시지에 영상으로 답하는 모습을 봤다는 내용이 담겼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에 '어린이 여러분, 답장 왔어요'라는 제목의 영상을 공개해 어린이들이 사전에 보낸 여러 메시지를 직접 읽고 답했다. 학생들은 이를 보고 자신들의 이야기도 대통령에게 전해보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시설을 지을까, 문화를 '찾아가게' 할까
이재명 대통령이 "방법을 꼭 찾아보겠다"고 밝힌 만큼 앞으로 어떤 방식의 제도나 정책이 검토될지에도 관심이 향하게 됐다.
농어산촌의 문화 접근성을 개선하는 방법은 모든 읍·면에 영화관이나 미술관을 새로 건립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활권 단위의 소규모 문화시설을 늘릴 수도 있고, 이동식 영화관과 찾아가는 공연·전시를 확대할 수도 있다. 문화시설이 있는 도시까지 이동하는 교통비를 지원하거나 학교 단위 문화체험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다.
기북초 학생들이 제안한 '어린이 문화패스' 역시 이런 여러 정책수단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아이디어다. 특히 학생들이 패스에 교통비 기능까지 넣어달라고 요구했다는 점은 농어산촌 문화격차가 단순한 문화예산 문제가 아니라 교통과 인구, 지역소멸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농어산촌 '문화 접근권' 문제까지 번질까
이재명 대통령이 엑스 글을 통해 구체적인 사업 신설이나 예산 편성을 약속한 것은 아니다. 아직 "방법을 꼭 찾아보겠다"는 답변을 내놓은 단계다.
그러나 대통령이 학생들의 편지를 직접 소개했고, 특히 문화시설이 멀리 떨어진 어린이들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만큼 포항 기북면 한 지역의 민원을 넘어 농어산촌 문화 접근권 문제로 정책 논의가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이재명 대통령에 이어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임종식 경상북도교육감, 박용선 포항시장 등 관계 부처 수장들이 어떤 조치를 취할지에도 시선이 향하게 됐다.
학생들이 요구한 건 거대한 복합문화시설은 아니었다. 보고 싶은 공연과 전시, 영화를 1년에 몇 차례라도 직접 보고, 그곳까지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작은 농촌학교의 다섯 학생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결국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는 곳이 멀다는 이유만으로 보고 싶은 세상까지 멀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세상이 변해도 인류에게 늘 중요한 그 것, '꿈'을 가꾸는 것에 대한 얘기로도 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