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한국 노동시장은 오래전부터 내부자와 외부자가 분리된 이중 구조를 형성해 왔다. 현실은 기업 규모, 고용 형태, 산업, 숙련 수준에 따라 훨씬 복잡하지만, 대기업·공공 부문 정규직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적 고용을 누리는 반면 중소기업·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는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조건에 놓이는 경향이 뚜렷하다.
문제는 격차가 커질수록 청년은 중소기업을 기피하고, 중소기업은 인력을 구하지 못해 자동화와 숙련 투자를 미루며, 낮은 생산성은 다시 낮은 임금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악순환에 있다. 청년의 취업난과 기업의 인력난이 동시에 나타나는 역설이 여기서 비롯된다. 인구 감소로 노동력 자체가 줄어드는 지금, 정년 연장만 따로 손보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개혁을 미룰수록 선택할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든다.
왜 지금까지 풀지 못했는가. 처방을 몰라서가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세대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원청의 비용 절감 압력이 하청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 조건으로 전가되는 구조도 격차를 고착시킨다. 정치의 시간과 정책의 시간이 어긋나고, 부처별 예산과 성과 지표로 나뉜 칸막이가 통합적 설계를 어렵게 만든다. 결국 장애물은 해법의 부재가 아니라 ▷조직된 이해관계의 저항 ▷단기 정치의 유혹 ▷조정 비용이다.
필요한 것은 목표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성과를 측정할 수 있고, 이해관계 조정이 가능한 과제부터 시작해 성과와 신뢰를 쌓고, 이후 더 큰 이해 조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첫째, 숙련이 실제 임금과 이동 기회로 이어지는 훈련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AI 활용 교육과 디지털 전환 훈련을 단순한 수료 실적에 그치게 하지 말고, 중소기업 재직자가 현장에서 쌓은 숙련을 공통 기준으로 인증해 다른 기업으로 옮길 때도 그 경력이 인정되도록 해야 한다. 고용노동부의 공공 고용 서비스도 채용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고 역량 진단, 경력 설계, 전직까지 연결하는 경력 플랫폼으로 바뀌어야 한다. 숙련이 축적되고 이동이 가능해질 때, 중소기업 일자리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경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둘째, 정부가 공공 부문에서 먼저 직무 중심 보수 체계의 성공 사례를 만들어, 민간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다만 임금 삭감이나 연공 서열 해체로 밀어붙이지 않고, 직무 가치를 투명하게 평가하며 전환 과정의 불이익을 최소화해야 노동계와 국민을 설득할 명분이 생긴다.
셋째, 이중 구조 완화는 노동정책만으로 풀 수 없다. 원청이 납품 단가와 비용만 압박하는 구조에서는 하청 기업이 임금과 훈련에 투자하기 어렵다. 납품 단가 연동제의 실효성을 높이고 기술 탈취에 대한 집행력을 강화해, 하청 기업이 여력을 갖도록 산업·공정거래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넷째, 사회안전망을 고용 형태와 무관하게 작동시켜야 한다. 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의 고용보험·산재보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단순한 노동 보호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가 불안으로 나쁜 일자리에 묶이지 않게 하는 생산성 정책이기도 하다.
다섯째, 사회적 대화는 고령자 재고용을 위한 직무 재설계처럼 이견이 적은 의제부터 다뤄 합의의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정년 연장을 둘러싼 논쟁도 노동시장 전체의 구조 개혁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다뤄야 한다.
대통령실과 국무총리실은 부처 간 칸막이를 조정하고,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작은 합의를 축적하며, 국회는 검증된 성과를 법과 예산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중 구조가 낳는 청년의 좌절과 기업의 인력난은 이미 절박한 신호다. 과거 역사적 경험처럼 위기가 개혁을 강제하기 전에, 작은 성공부터 하나씩 축적해야 한다. 강제된 개혁은 제도의 왜곡과 현실적 부작용을 낳는다. 노동시장 개혁은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 작은 성공을 축적해 신뢰를 만들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더 큰 개혁으로 나아가는 긴 과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