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비춰 본 한국]사회는 나에게 … 수능, 공평함이라는 환상

입력 2026-08-28 11: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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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열 전 대구문화재단 사무처장
김성열 전 대구문화재단 사무처장

◆우리가 부모가 되면 나아지겠지

고등학교 시절, 야간자습을 마치고 돌아오며 친구들과 말했다. 우리가 부모가 되면 우리 아이들은 적어도 이런 경쟁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사십 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나라는 고등학교보다 이른 나이부터 더 정교해진 사교육 시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쓴다. 그 믿음은 천진난만했다. 우리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더 멀리 갔다.

◆ 공평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습관

우리 사회는 수능을 '공평한 경쟁'이라 믿는다.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문제 앞에 전국의 수험생이 동시에 앉는다는 사실이 그 근거다. 그 뿌리는 과거제도와 근대의 고시제도까지 이어진다. 가난한 집안 출신도 시험 하나로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서사는 우리나라가 오래도록 아껴온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날 같은 문제를 푼다'는 절차의 공평일 뿐이다. 준비에 들인 시간과 비용, 기회와 환경은 그 안에 없다. 과거제도 역시 공평한 선발제도로 여겨졌지만, 실제로 시험을 준비할 시간과 자원을 가진 이들은 대개 양반가의 자제였다. 형식의 평등이 실질의 불평등을 가리는 오래된 습관은 지금도 반복되는지 모른다.

◆ 모두를 한 줄로 세우지 않는 구조

캐나다에서는 먼저 자신이 갈 길을 정한다.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일할지, 몇 달 혹은 몇 년의 기술교육이나 대학과정을 거칠지에 따라 9학년 무렵부터 선택과목이 달라진다. 12학년이면 학생들은 대부분 서로 다른 과목을 듣는다. 그러니 학생 전체를 하나의 기준으로 세워 순위를 매기는 경쟁은 성립하기 어렵다. 성적은 다른 학생과의 순위가 아니라 각 과목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얼마나 도달했는지를 기준으로 매겨진다. 말 그대로 미래 공부를 위한 '수학(修學) 능력'을 보는 것이다.

고교 졸업 후 바로 일할 경우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BC)주의 최저시급은 현재 시간당 18달러 남짓이다. 대학을 택하면 당장의 소득을 포기하고 4년간 학자금 대출까지 안고 공부한다. 어느 길이든 나름의 대가와 몫이 있을 뿐,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선택이다. 그 대가는 시간당 얼마를 받느냐로 돌아온다.

여러 갈래의 선택이 가능한 것은 교육제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최저임금과 누진세, 사회보장제도 등 여러 사회적 장치들이 그 선택의 차이가 삶의 우열로 굳어지는 것을 어느 정도 완충한다.

물론 인기 학과는 정원이 한정돼 높은 성적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압박은 전국의 수험생이 같은 시험을 치르는 구조와는 다르다. 한국의 수능제도 역시도 수시전형이 있어 모든 입시가 수능 하나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 수시는 정해진 수능 등급을 넘어야 최종 합격할 수 있고, 정시는 수능 성적이 당락을 크게 좌우한다.

그 시험은 같은 날 같은 시간, 일 년에 딱 한 번 치러진다. 일년 중 그 하루의 시험 결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과 가능성을 재단한다. 마치 각자에게 서열의 낙인을 찍는 듯한 이 구조를 나는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렇게 '한 줄 세우는 경쟁'을 오랫동안 '공평'이라 불러왔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우리가 그동안 추구해 온 것이 정말 공평한 경쟁이었을까. 아니면 '공평'이라는 미명 아래 그 잔인함을 외면한 채, 내가, 혹은 내 아이가 우월한 자리에 설 가능성 하나에 해마다 모든 것을 걸어 온 것은 아닐까. 같은 시험을 치렀으니 높은 자리는 온전히 실력으로 얻은 것이 되고, 밀려난 사람은 그 결과를 자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공평'은 불평등한 조건을 바로잡는 원리가 아니라 경쟁의 결과를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었다. 우리는 '나'와 '너'를 보기 전에 늘 '너 위의 나' 혹은 '나 위의 너'부터 보아 온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묻고 싶다. 그 경쟁에서 이겼다는 이들은 지금 행복한가. 또 다른 이름의 경쟁 속에서 여전히 누군가와 자신을 견주며 순위를 찾고 있지는 않은가.

열여덟 어느 하루의 성적표가 한 사람이 평생 서야 할 자리까지 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숫자는 사람의 가치가 아니라 단 한 번의 시험에서 얻은 상대적 위치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쯤 그 줄에서 사람을 꺼내볼 수 있을까.

김성열 전 대구문화재단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