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락 한국화가(경북대 미술학과 교수)
텔레비전을 보며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마음을 붙잡는 한마디를 만났다. "시드니까 아름다운 거죠." 어느 꽃 도매상의 인터뷰였다. 화려하게 꽃 피웠던 시절이 지나, 저물어가는 시간을 통과하며 그 존재가 더 빛난다는 뜻이리라. 우리 존재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몸은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고, 질병에 잠식돼 가는 서글픈 시간은 피할 수 없는 노년의 숙명처럼 다가온다.
영화 '황금 연못'에는 기억 상실을 앓는 80세 노인 노먼이 등장한다. 그의 아내 에델은 열세 살 의붓손자 빌리에게 남편을 이렇게 설명한다. "노먼은 지금 있는 힘을 다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거란다. 너도 그렇지 않니?" 노화와 질병이라는 미로 속에서 헤맬지언정, 노년은 멈춰 선 존재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해 제 길을 찾아가는 엄연한 달리기다.
인생은 흔히 단거리 경주나 마라톤에 비유되지만, 더 길게 보면 바통을 이어받아 미래의 후손에게 넘겨주는 계주에 가깝다. 이 끊임없는 이어달리기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나에게 주어진 구간을 최선을 다해 뛰는 것뿐이다. 그렇게 묵묵히 달려온 삶의 궤적은, 수묵화의 화폭 위에서 저마다 온 호흡을 모아 긋는 단 하나의 선과 닮아있다. 시공간을 응축한 찰나의 점들이 모여 하나의 선을 이루듯, 매일의 순간들이 모여 삶이라는 선이 된다. 홀로 떨어져 나아가는 듯해도 우리가 그은 각자의 선들은 서로 겹치고 이어지면서 함께 삶의 공간을 채워가는 화면 속 공동체를 이룬다.
젊은 날에는 삶을 표현하는 예술이 전부인 줄 알고 목을 매고 살았다. 때로는 거대한 세상 앞에서 예술이란 참 힘없고 부질없는 짓 같아 보였다. 그럼에도 이 길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그 유약함 속에 진짜 나를 드러내는 오롯한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붓을 쥐고 선을 긋는 매 순간이 그러했다.
종이 위에 먹이 번지고 마르는 과정 역시 노년의 시간과 닮아있다. 처음 화폭에 닿은 먹물이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시절이 청춘이라면, 세월의 숨결이 지나간 자리마다 그윽한 결을 남기는 것은 노년의 몫이다. 붓질의 끝자리, 물기가 다해 하얀 종이가 드러나는 거칠고 마른 먹의 흔적이 바로 '비백(飛白)'이다. 그 메마른 자욱 속에서 오히려 깊은 내공이 드러나듯, 기력이 쇠해가는 황혼은 화려한 색채를 지워내고 오직 묵직한 먹빛 하나로 인생의 정수를 증명하는 시간이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번져가는 먹색의 깊이를 완성하는 과정인 셈이다.
우리는 매일 자신의 선을 긋는 순간들을 살아간다. 내 삶의 끝자락, 눈 밝은 어떤 이가 "죽기 전에 그린 그림이 제일 좋네"라고 한다면 작가로서 더없는 영광이겠다. 내 인생의 치열한 한줄기 선이, 화폭 위 넉넉한 여백과 어우러져 담백하고 아름답길 소망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