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는다
※우리 명작 고전소설을 뒤틀어 지금 현실을 바라보는 팩션(사실을 뜻하는 '팩트'와 허구를 의미하는 '픽션'의 합성어) 콘텐츠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원작 설명
춘향전은 조선 후기 판소리계 소설이다. 전북 남원이 이야기의 배경이다. 양반 이몽룡과 기생의 딸 성춘향이 사랑을 맺고 이별한 뒤, 남원에 부임한 사또 변학도가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면서 갈등이 전개된다. 수청을 거부한 춘향은 옥에 갇히며 처벌 위기에 놓인다. 이후 과거에 급제한 몽룡이 암행어사로 등장해 변학도를 처벌하고 춘향을 구해낸다. 판소리 '춘향가'를 바탕으로 형성됐으며, 신분을 넘는 사랑과 여성의 절개가 핵심 주제다.
▶"춘향전을 단순한 '정절 이야기'로 읽는 건 이 작품이 만들어내는 긴장을 놓치는 일이야."
교수는 수업 초반, 이 이야기를 '두 개의 서로 다른 논리가 충돌하는 구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는 기존 질서다. 신분, 역할, 그리고 관계의 위계로 유지되는 체계. 다른 하나는 개인의 선택이다. 관계를 스스로 정의하려는 움직임.
"춘향은 왜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했을까."
교수가 묻자, 윤재가 답했다.
"사랑 때문 아닙니까?"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결과야. 중요한 건 선택 방식이다."
몽룡이 처음 춘향을 대한 방식은 명확했다. 그도 춘향을 그저 한 명의 '기생'으로 인식했다. 애정 관계는 존재했지만, 그것은 제도 안에서 규정된 형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생긴다. 몽룡은 춘향을 신분이 아닌 한 인간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춘향 역시 자신의 위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관계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으로 바꾼다. 이 변화는 곧 관계의 성격 자체를 바꾼다. 신분에 의해 규정되던 관계가, 개인의 선택에 의해 재정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관계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점이 중요해."
교수는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신분 관계 → 선택 관계
신분제가 여전히 굳건히 자리한 세상에서 이 변화는 곧 충돌을 만든다. 변학도의 등장은 단순한 악인의 등장으로 볼 수 없다. 그는 기존 질서의 가장 명확한 형태다.
"너는 기생일 뿐이야."
변학도의 이 발언은 사실 확인이 아니라 질서에 대한 선언으로 읽어야 한다. 춘향의 수청 거절은 이 선언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였다.
▶수업이 막바지로 향하며 교수는 몇 가지 자료를 꺼냈다. 그는 춘향전의 결말을 짧게 정리한 뒤, 학생들에게 서로 다른 기록들을 잇따라 펼쳐 보였다. 남원 지역 필사본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다시 만났다. 모두가 그 결합을 당연하게 여겼다."
반면, 조정에서 올라온 의견서엔 결이 좀 다른 문장이 남아 있었다.
"신분 질서에 미칠 영향 검토 필요."
"반대가 있었던 거네요. 같은 사건인데 왜 다르게 기록됐을까요?"
윤재가 묻자 교수는 대답 없이 마지막 자료를 펼쳤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춘향은 끝까지 정절을 지켰다."
세 문장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나는 서사의 결승선 바로 앞에서 두 사람이 신분을 초월해 결합하는 걸 당연한 수순으로 기록했고, 또 하나는 그 결합이 사회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문제 삼았으며, 마지막 하나는 이 모든 걸 '정절'이라는 단어로 '퉁치고' 있었다.
▶"그럼 정절은 혹시…"
윤재가 말을 이어나갔다.
"…나중에 만들어진 건가요?"
교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필요해서 만들었겠지."
"왜죠?"
"마치 인기 드라마나 요즘 유행하는 연프(연애 예능프로그램)처럼 남원 바닥에서 중계되던 사랑이 미담이자 교훈으로도 맺어지길 바라는 민중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도, 신분제에 균열이 생기면 세상이 망할 것처럼 임금에게 통촉을 요구하는 기득권의 트집을 누그러뜨리기에도, 여러모로 탁월하게 쓸 수 있는 포장지 같은 것이었을테니까."
교수는 두 주인공 몽룡과 춘향의 소설 너머 여생이 어떠했을지도 상상했다. 신분 차이라는 허들을 넘는 시도야 청춘 한때의 넘치는 에너지로 가능했겠으나, 남은 인생은 그걸로만 지속할 수 없었을 터.
"좌의정까지 오른 몽룡과 정경부인(정승급 인물 부인)이 된 춘향은 지금 같으면 '동상이몽 너는 내 운명' 류 부부 예능프로그램에 다시 출연하지 않았을까? 과거에도 지금도 셀럽(유명인)의 로맨스는 그렇게 소비(라고 쓰고 '유지'라고 읽는다)되는 거니까."
▶함께 보면 좋을 작품=로미오와 줄리엣/방자전/작은 아씨들
◇책 '작은 아씨들'(1868, 루이자 메이 올컷)=여성의 지위가 지금 같지 않았던 시대에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사랑을 선택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전근대적 시대 배경에서 관계를 스스로 정의하려고 한 춘향의 주체적 태도와 겹친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 바즈 루어만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클레어 데인즈 출연)=원작은 잉글랜드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사회적 제약 속에서 사랑을 선택한 연인의 이야기다. 신분과 질서의 충돌 구조가 춘향전과 유사하다.
◇영화 '방자전'(2010, 김대우 감독, 김주혁·류승범·조여정 출연)=춘향전을 이몽룡의 하인 방자의 시선으로 뒤집은 영화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랑과 구출 서사가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는 의심의 태도를 조명하며 고전을 읽는 새로운 시각 및 접근의 가치를 짚는다.
▶연결고리 시사 이슈=연애가 포장이 되고 조건이 되는 시대
춘향전과 연결해 볼 수 있는 시사 이슈는 연애 예능과 셀럽 커플 소비가 만들어내는 사랑의 포장 방식이다.
몽룡과 춘향의 관계는 신분 질서를 흔드는 불편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를 '정절'이라는 말로 감싼다. 사회가 수용 가능한 미담이자 교훈으로 포장한 것.
현대사회의 포장지는 미디어다. '나는 솔로' '솔로지옥' '환승연애' 같은 인기 연애 예능에서 연애는 감정의 교환인 동시에 외모·직업·나이·말투·경제력·선택받는(구애하는) 방식·연애 서사의 완성도로 평가된다. 시청자는 남의 연애를 구경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괜찮은 상대인지, 어떤 조합이 급이 맞는 만남인지, 어떤 커플 서사가 납득이 가능한지 두루 학습한다.
이준영·유우현(인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이 2023년 8월 '미디어 경제와 문화'에 발표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나는 솔로 시청이 연애 및 결혼 기대감에 미치는 영향'은 '나는 솔로' 시청 경험이 있는 미혼 성인 남녀 277명을 조사, 시청 빈도가 높을수록 사회적 비교가 증가하고 이 사회적 비교가 결혼 기대감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또 마크로밀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24년 4월 공개한 '연애 예능 프로그램 관련 인식 조사'에선 59.8%가 연애 프로그램 시청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10명 중 7명은 "요즘은 연애 잘 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봤다. 연애가 사회적 역량으로도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연애 예능이 현실의 사랑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방향이 반대다. 미디어는 연애를 편집·비교·서열화하며, 보기 좋은 서사로 포장한다. 이러한 포장이 반복되면 사랑은 감정만 갖고 설명되지 않는다. 조건이 맞는지, 주변이 납득할 수 있는지, 서사가 예쁜지, 선택받을 만한 사람인지가 관계를 설명하는 평가의 언어가 된다.
물론 연애 예능이 사랑의 계급화와 스펙화를 새로 만들었다고 볼 순 없다. 조건을 따지는 연애와 결혼 문화는 과거부터 존재했다. 다만, 미디어는 그 조건들을 더 잘 보이게 만들고, 더 말하기 쉽게 하며, 때로는 더 그럴듯한 감정의 언어로 포장한다.
결국 선택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는다. 춘향의 사랑이 정절 이야기로 포장됐듯, 오늘날의 연애도 상업 미디어 안에서 조건과 서사, 캐릭터와 갈등으로 재가공된다. 개인은 선택하지만, 미디어는 그 선택을 시청률과 조회수를 부르는 이야기로 바꾼다.
※'⑤토끼전-토끼는 처음부터 속지 않았다'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