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년,격동 80년] 주민등록증도 예비군도… 시작은 '김신조 사건'

입력 2026-06-05 13:30:00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1968년

1968년 1월 22일자 매일신문 1면.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기습 시도인
1968년 1월 22일자 매일신문 1면.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기습 시도인 '1·21 사태' 발생 직후, 서울 시내 침투와 군·경 교전 상황을 긴급 보도하고 있다. 당시 신문은 '서울시내에 무장간첩단', '30여명 검문돌파' 등의 제목으로 사건을 전하며 전국적인 비상 경계 분위기를 담아냈다.

1968년 대한민국에는 많은 것이 새로 생겨났다. 향토예비군과 주민등록증, 교련 수업과 반공웅변대회, 천리행군과 유격훈련, 북악스카이웨이와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까지. 지금은 너무 익숙해진 제도와 풍경 상당수는 사실 한 사건 이후 등장했다.

그 출발점은 1968년 1월 21일 밤.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500m 앞까지 침투했던 '1·21 사태'다. 사건은 유일한 생존자였던 북한 공작원 김신조(金新朝)의 이름을 따 흔히 '김신조 사건'으로 불린다. 실패한 침투 작전이었지만, 그날 이후 대한민국은 이전과 다른 나라가 됐다.

◆ 박정희를 죽여라… '124부대'

1968년 1월 2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은 청와대와 미국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동시 타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작전에 투입된 것은 함경도 출신 장교들로 구성된 특수부대 '124군 부대' 31명. 이들은 국군 복장으로 위장한 채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완전 무장했다. 1월 5일부터 황해도 사리원에서 청와대 모의 습격 훈련이 반복됐고, 1월 13일 최종 목표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확정됐다.

1월 18일 새벽, 특공대는 휴전선을 넘어 얼어붙은 임진강을 걸어서 건넜다. 그러나 서울 진입 직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1월 19일 경기 파주 초리골 야산에서 땔감을 하러 온 우씨 형제 4명과 마주친 것이다. 당황한 공비들은 북한에 처리 지시를 요청했지만 암호를 해독하지 못했다. 결국 투표 끝에 형제들을 살려 보내기로 했다. "신고하면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협박도 남겼다. 하지만 형제들은 집에 내려오자마자 부모에게 사실을 알렸고, 곧바로 신고가 이뤄졌다.

1968년 1월 21일 밤 김신조 등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 31명이 서울 청운동과 일대에 침입, 종로경찰서장을 사살하고 민간인 6명을 살해했다. 사진은 체포된 무장공비 김신조. 매일DB
1968년 1월 21일 밤 김신조 등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 31명이 서울 청운동과 일대에 침입, 종로경찰서장을 사살하고 민간인 6명을 살해했다. 사진은 체포된 무장공비 김신조. 매일DB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경보가 울렸고 군·경 합동 소탕작전이 시작됐다. 다른 공비들이 차례로 사살되는 동안 김신조(金新朝)는 한 독립가옥에 숨어 자폭용 수류탄 하나만 남긴 채 버텼다. 1월 22일 새벽 2시 25분, 군이 "나오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자 그는 수류탄을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31명 가운데 29명은 사살됐고,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오직 김신조만 생포됐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를 처단하러 왔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 대한민국이 달라지다

김신조 사건은 단순한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이후 대한민국의 안보 시스템과 사회 분위기 자체를 바꿔놓은 역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정부는 곧바로 국가 안보 체계를 전면 재편했다. 대표적인 변화가 250만 명 규모의 향토예비군 창설이었다. '국민 모두가 안보의 주체'라는 개념 아래 민간인까지 포함한 전국 단위 동원 체계가 구축됐다. 이후 전투경찰대와 육군3사관학교 설립도 추진됐고, 청와대 경비 및 대간첩 작전 체계 역시 대폭 강화됐다.

군 문화도 크게 달라졌다. 국방력 보강을 이유로 군 복무 기간이 연장됐고, 육군은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해·공군은 3년에서 3년 6개월로 늘어났다. 오늘날까지 군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천리행군, 유격훈련, 5분 대기조 같은 강도 높은 훈련 체계 역시 이 시기를 거치며 자리 잡았다.

사회 분위기 역시 급격히 변화했다. 학교와 직장, 마을 단위까지 반공 교육과 안보 의식이 일상처럼 스며들었고, 반공웅변대회와 교련 수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과 북악스카이웨이 조성 역시 안보 상징 강화 흐름 속에서 추진됐다.

주민등록증 제도도 이 사건 이후 본격 도입됐다. 당시 정부는 간첩과 불순분자를 식별하고 행정 통제를 강화한다는 명분 아래 전국민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구축하고 주민등록증 발급을 확대했다.

북한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비밀 특수부대인 '684부대', 이른바 실미도 부대도 창설됐다. 김신조 일당과 같은 31명 규모로 꾸려진 이 부대는 북파 공작 임무를 목표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결국 실패한 침투 작전이었던 1·21 사태는 이후 대한민국 사회를 더욱 강한 안보 국가 체제로 재편하는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