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 년 전 모습 그대로 살아온 '살아있는 화석' 군부
황의욱 교수팀, 서해·남해 갯벌서 가시군부 신종 발견
미토콘드리아 유전체 분석으로 9천200만 년 전 진화 분화 규명
이동성 낮고 형태 유지력 높아… 기후변화 연구 '열쇠' 주목
여름철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를 떠올려보자. 바위 표면에 납작하게 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작은 해양 생물을 본 적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조개도, 달팽이도 아닌 듯한 투박한 방패 모양의 이 생물의 이름은 군부(Chiton)다.
군부는 약 3억 년 전 고생대부터 현재까지 거의 같은 형태를 유지해온 생물로, 학계에서는 흔히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공룡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온 생물이 지금도 바다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경북대 대학원 첨단바이오융합학과 황의욱 교수 연구팀은 바로 이 군부 가운데 새로운 종을 한반도 연안에서 발견하고, 약 9천200만 년 전 진화적 분화 과정을 밝혀내는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이번 신종 발견은 해양 생물 다양성 연구와 진화 연구, 기후변화 모니터링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겉은 딱딱, 속은 부드러운 '츤데레' 생물
군부는 연체동물문에 속하는 해양 생물로 전 세계 바다에 약 1천 종 가까운 현생종이 분포한다. 주로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는 조간대에서 바위나 암반에 붙어 살아간다.
군부의 몸 위에는 8개의 판 모양 껍데기가 이어져 있어 납작한 갑옷처럼 보인다. 이 구조 덕분에 군부는 바위에 몸을 단단히 밀착시키고 강한 파도에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몸 가장자리에는 '환대(girdle)'라 불리는 띠 구조가 있는데, 이 부분에는 작은 가시나 돌기가 발달해 있다. 특히 가시군부(Acanthochitona)는 환대에 난 가시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가시군부는 전 세계적으로 약 80여 종이 알려져 있다.
이번에 경북대 연구팀이 발견한 신종 역시 이 가시군부에 속한다.
연구팀은 지난 3년간 서해와 남해 연안에서 군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가시군부 신종 '아칸토키토나 페록사(Acanthochitona feroxa)', 우리말로 '거친털군부'를 발견했다. 이번 발견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한국 연안의 가시군부는 총 6종으로 늘었다.
거친털군부는 통영·여수·제주·태안 등 우리나라 연안에서 확인됐다. 진흙이 섞인 해안이나 파도가 강한 조간대 환경에서 살아가는데,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몸 주변의 가시 구조가 특히 발달한 것으로 분석됐다.
흥미로운 점은 겉모습과 달리 미세구조에서는 부드러운 특징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환대 등면의 가시가 유사 종보다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를 띠며, 꼬리판 역시 근연종에 비해 크기가 작고 원형에 가까운 모양을 보인다.
황 교수는 이를 두고 "겉은 거칠어 보이지만 미세구조는 오히려 부드러운 특징을 가진, 일종의 '츤데레 같은 생물'"이라고 설명했다.
◆DNA 분석으로 밝혀진 9천200만 년 전의 진화
이번 연구의 또 다른 핵심 성과는 군부의 진화 시기를 분자 수준에서 규명했다는 점이다.
기존 군부 연구는 대부분 외형을 기준으로 종을 구분했다. 그러나 군부는 형태 변화가 크지 않아 겉모습만으로는 종을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연구팀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토콘드리아 유전체 분석을 활용했다. 미토콘드리아 DNA는 생물 간 진화 관계를 분석하는 데 널리 사용되는 유전 정보다.
연구팀은 신종을 포함한 6종의 가시군부 미토콘드리아 유전체를 해독하고 이를 토대로 분자시계 분석을 진행했다.
그 결과 가시군부의 주요 진화적 분화가 약 9천200만 년 전 백악기 후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지구에서는 해수면 상승으로 얕은 바다 환경이 크게 확장된 시기였다. 연구팀은 이러한 환경 변화가 새로운 서식지를 만들어 해양 무척추동물의 종 분화를 촉진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는 고대 해양 환경 변화와 생물 진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군부, 기후변화 연구의 '지표 생물'
이번 연구는 서태평양 해양 생물 다양성 연구의 공백을 메웠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군부는 전 세계 해안에 널리 분포하지만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 주변 해역의 종 다양성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분야로 꼽힌다.
연구팀이 서해와 남해 연안에서 새로운 가시군부 종을 확인하면서 한반도 연안의 해양 생물 다양성이 예상보다 풍부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거친털군부는 현재까지 수집된 표본 대부분이 대한민국 연안 해역에서 확인됐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러한 분포 특성이 한반도 특산종일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보고 있다.
군부는 기후변화 연구에서도 중요한 '지표 생물'로 평가된다. 바위나 해저 기질에 붙어 살아가기 때문에 이동성이 거의 없어 환경 변화가 발생해도 쉽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황 교수는 "군부는 이동성이 매우 낮아 특정 해안에서 분포 변화나 개체 수 변화가 나타날 경우 그 지역 해양 환경 변화의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유전자원 주권 확보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최근 국제사회에서는 생물 유전자원을 둘러싼 국가 간 권리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으며, 생물다양성협약(CBD)과 나고야 의정서가 관련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다.
연구팀은 군부의 유전체 데이터와 유전적 특성 정보를 구축함으로써 향후 해양 생물 자원의 활용과 관리에 필요한 학술적 기반을 마련했다.
황 교수는 "우리 연안 해양 생물의 유전 정보를 체계적으로 확보하는 것은 단순한 학술 연구를 넘어 국가 유전자원 주권을 지키는 중요한 작업"이라며 "앞으로도 한반도 해양 생물의 다양성과 진화사를 지속적으로 밝혀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연구는 BK21 4단계 원헬스혁신인재양성사업단과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연구 결과는 해양·담수 생물학 분야 국제학술지 Marine Life Science & Technology(JCR 상위 1.7%) 2월 16일자 온라인판에 게재됐다. 교신저자는 황의욱 교수, 제1저자는 경북대 의생명융합공학과 김이향 석사과정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