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54> 1967년 대(大)대구 건설 밑거름 서문시장

입력 2025-11-21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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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1월 서문시장(가운데 2층 콘크리트 건물) 일대 모습(위)과 2025년 11월 청라언덕 상공에서 본 서문시장 일대 모습. 지난 2016년 11월 화재로 전소된 서문시장 4지구(가운데)가 9년째 텅 비어있다. 사진= 매일아카이빙센터·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1967년 11월 서문시장(가운데 2층 콘크리트 건물) 일대 모습(위)과 2025년 11월 청라언덕 상공에서 본 서문시장 일대 모습. 지난 2016년 11월 화재로 전소된 서문시장 4지구(가운데)가 9년째 텅 비어있다. 사진= 매일아카이빙센터·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1967년 11월 계성중·고교 강당과 강당 뒤 왼쪽에 자리한 핸더슨관. 학교 너머 언덕 위 큰 건물은 1964년 신축한 성밖교회(현 대구서교회)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7년 11월 계성중·고교 강당과 강당 뒤 왼쪽에 자리한 핸더슨관. 학교 너머 언덕 위 큰 건물은 1964년 신축한 성밖교회(현 대구서교회)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7년 11월 서문시장 주변 풍경. 시장 너머 기와집 사이로 초가집도 보인다. 왼쪽 멀리 언덕 위로 보이는 건물은 1966년 완공된 내당성당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7년 11월 서문시장 주변 풍경. 시장 너머 기와집 사이로 초가집도 보인다. 왼쪽 멀리 언덕 위로 보이는 건물은 1966년 완공된 내당성당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7년 11월 서문시장 4지구 일대 모습. 달성공원 왼편에 자리한 큰 건물은 대성초등학교, 그 왼쪽 한옥 주택가는 옛날 달성고분군이 자리했던 곳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7년 11월 서문시장 4지구 일대 모습. 달성공원 왼편에 자리한 큰 건물은 대성초등학교, 그 왼쪽 한옥 주택가는 옛날 달성고분군이 자리했던 곳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7년 11월 달성공원 일대 풍경. 일제강점기 달성공원에 들어선 대구신사 건물이 철거(1966년)된 직후 모습이다. 공원 오른쪽 구 원화여고 건물 옆에 보이는 조양회관은 1984년 동구 망우당 공원에 이전 복원됐다. 가운데 종탑 건물은 신축(1977년)전 서문교회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7년 11월 달성공원 일대 풍경. 일제강점기 달성공원에 들어선 대구신사 건물이 철거(1966년)된 직후 모습이다. 공원 오른쪽 구 원화여고 건물 옆에 보이는 조양회관은 1984년 동구 망우당 공원에 이전 복원됐다. 가운데 종탑 건물은 신축(1977년)전 서문교회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7년 11월 대구는 이른바 '대(大)대구 건설'로 부산했습니다. 앞서 1965년 2월 10일 발표된 '대대구 건설' 계획은 대구 인구가 10만 7천명이던 1936년 일제 강점기에 첫 도시계획을 한 이래 29년 만. 그새 인구가 80만(1965년)으로 불어나 10년 뒤(120만명 추산)를 대비해 대구 지도를 새로 그리는 대역사였습니다.

구릉지 동대구는 신축 중인 동대구역을 중심으로 부도심을, 들판이 좋은 서대구는 주택지와 제2공단이 낙점됐습니다. 한옥이 즐비한 남대구는 두류산과 앞산에 대공원을, 대구역을 낀 북대구는 제3공단을 조성키로 했습니다. 도로망은 동서관통로(현 달구벌대로)를 비롯해 3개 순환선에 5개 방사선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기로 했습니다.

청사진은 가히 매머드급. 그러나 시작부터 험난했습니다. 사업을 추진할 국고 보조금이 내년(1968년) 예산에서 대부분 빠졌습니다. 연초에는 착공됐어야 할 동서관통로와 기공식을 가진 제3공단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 알고보니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1971)이 3년 반으로 단축돼, 지방에 내려올 돈줄이 마른 탓이었습니다.

"서문·교동시장을 불하(拂下), 55억 염출(捻出)해 도시 개발에" 그해(1967년) 11월 14일자 매일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공설시장(시유지)인 서문시장 부지 9천89평(30,047㎡)과 교동시장 내 시유지 약 3백평(992㎡)를 민간에 팔아 돈을 만들겠다는 것. 이와 함께 서문시장 사진기사도 실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8월, 서문시장은 2지구를 시작으로 1지구(1973년), 3·4지구(1974년), 5지구(1975년)가 잇따라 민간에 매각됐습니다. 이 과정에 영세 상인들은 가게를 떠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은 대(大)대구 건설로, 오늘의 대구 기틀을 닦는 밑천이 됐습니다.

당시 서문시장 일대를 촬영한 필름을 어렵게 찾았습니다. 시장 주변 시가지를 조금씩 겹쳐 촬영한 필름은 모두 4컷. 필름을 스캔해 포토샵 포토머지(Photomerge)에서 서로 붙여 봤습니다. 58년 전 모습이 생생한 파노라마로 되살아났습니다.

1967년 11월 서문시장은 2지구와 5지구를 빼고는 현대식으로 지은 콘크리트 2층 건물(1·3·4지구). 7년 전 목조 상가를 홀라당 태운 대화재를 겪으면서도 한강 이남에서 제일가는 장터임을 웅변하듯 저렇게 다시 일으켰습니다.

시장 너머 주택가는 기와집 사이로 초가가 옹기종기 자리를 지키고 섰습니다. 달성공원은 일제의 잔재 대구신사(神社)를 헐고(1966년) 서울 창경원 다음 가는 동물원 개장(1970년)을 예고했습니다.

그 후 58년. 이곳은 또 다른 변화를 준비중입니다. 계성중학교 부지에는 2032년 국립 대구독립역사관이 들어서고, 달성공원은 동물원을 옮긴 뒤 옛 토성으로 재 모습을 되찾을 예정입니다.

공원 왼쪽 언덕 주택가는 5세기 중후반 신라시대 고분이 무려 87기나 산재한 달성고분군이 있던 곳. 1923년 이곳 무덤에서 신라 금관을 빼닮은 금동관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미발굴 상태로 주택이 들어서, 고분 발굴은 숙제로 남았습니다.

공원 옆 대성초교는 월드스타 방탄소년단(BTS) 멤버 '뷔'(본명·김태형)가 뛰어 놀던 모교. 교정 담벼락은 그를 응원하는 60m 길이의 벽화거리가 조성돼 핫 플레이스가 됐습니다.

안타깝게도 서문시장 4지구는 1975년에 이어 2016년에 또 화마에 당해 상인들이 9년째 속앓이 중입니다. 돌아보면 오늘의 대구를 위해 밑거름이 됐던 서문시장. 해방 이후 10여 차례 화재에도 오뚝이처럼 일어섰 듯 이젠 시민들이, 대구시가 따듯한 관심을 가질때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류민단이 1906년 11월 3일 천장절(일왕의 생일)을 기념해 달성공원 내에 건립한 신사 건물(현재 물개사 자리)이 보이는 달성공원 항공촬영 사진. 대구신사는 1966년 8월 13일 철거됐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류민단이 1906년 11월 3일 천장절(일왕의 생일)을 기념해 달성공원 내에 건립한 신사 건물(현재 물개사 자리)이 보이는 달성공원 항공촬영 사진. 대구신사는 1966년 8월 13일 철거됐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23년 달성공원 옆 내당동 달성고분군 제37호분에서 출토 당시 노출된 금동관. 작은 사진은 수습된 금동관.
1923년 달성공원 옆 내당동 달성고분군 제37호분에서 출토 당시 노출된 금동관. 작은 사진은 수습된 금동관.
2021년 방탄소년단(BTS) 멤버
2021년 방탄소년단(BTS) 멤버 '뷔'(김태형)의 모교인 대구 대성초등학교 외벽에 설치된 타일 벽화. 뷔의 생일을 맞아 중국 팬클럽 '바이두뷔바'의 제안으로 설치한 이곳이 명소로 떠 오르자 2022년 서구청이 벽화거리를 33m에서 60m까지 연장 설치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5년 11월 대화재로 전소된 서문시장 4지구에서 이듬해인 1976년 재건축을 위한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5년 11월 대화재로 전소된 서문시장 4지구에서 이듬해인 1976년 재건축을 위한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6년 재건축한 서문시장 4지구가 2016년 11월 30일 대화재로 또 무너져 이듬해 4월 철거되고 있다. 화재 발생 9년째인 2025년 11월 현재 재건축은 착공도 못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6년 재건축한 서문시장 4지구가 2016년 11월 30일 대화재로 또 무너져 이듬해 4월 철거되고 있다. 화재 발생 9년째인 2025년 11월 현재 재건축은 착공도 못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