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중반 미국 원정 출산 붐이 일었다. 1980년대도 원정 출산이 없진 않았지만 재벌가 등 일부 부유층에 국한(局限)됐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조기 유학·명문대 진학 등 교육과 병역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중산층으로 확산됐고 다양한 패키지 상품과 관련 전문 업체까지 등장할 정도로 시장 규모가 커졌다. 자녀의 미국 시민권 획득을 위해 너도나도 출산 원정을 떠나 비공식적으로 '한국 신생아 100명당 1명꼴로 미국 시민권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연간 5천 명 안팎이 미국으로 원정 출산을 떠난 것으로 추산되기도 했다.
원정 출산이 가능한 것은 미국이 속지주의(屬地主義), 즉 출생지주의를 채택하고 있어서다. 미국 땅에서 태어난 아이는 부모 국적에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비행기를 타고 가다 미국 영공에 진입하자마자 기내에서 출산한 경우도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기내 출산'을 위한 '만삭 원정'이 무용담(武勇談)처럼 나돈 배경이다. 그러나 기내 출산 자체가 드물고 무엇보다 위험해 요즘은 임신 36주 이후 승객의 탑승을 제한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제는 이러한 원정 출산, 기내 출산이라는 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출생 시민권'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지난 1월 발동(發動)해서다. 미 연방 대법원이 얼마 전 이 행정명령을 일부 주에서는 실행할 수 있다고 결정하면서 28개 주에선 문제 삼지 않는 한 이 행정명령이 적용된다. 다만 다른 22개 주에선 여전히 출생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고, 아직 헌법 개정, 대법원의 행정명령 합헌성 판단 등의 과정도 남아 있어 원정 출산의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다.
출생 시민권 '인정' '금지' 주(州)로 나뉘면서 특정 주에 '원정 출산족'들이 몰리는 새로운 풍속(風俗)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그 경우 미국의 한인 밀집 지역 지형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미국 속지주의와 원정 출산'의 시대가 이제 막을 내린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막무가내식' 스타일로 봐선 '원정 출산' '기내 출산'이 '그때 그 시절'의 이야깃거리로 기억될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hoper@imaeil.com
댓글 많은 뉴스
정부, 北 우라늄 폐수 조사 때 '핵심물질' 검사 빼먹었다
"준비된 대통령 맞나" "문전박대"…'한미 2+2 협의' 취소통보에 국힘 총공세
[속보] 박찬대, '尹 체포 저지 국힘 45명 의원' 제명 결의안 발의
'휴가 반려' 이진숙 "대의에 목숨 걸어본 자만 돌 던져라"
박원순 아들 "원격 증인신문 받을래" 재판 또 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