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쏟아진 비를 탓해 보자.
이달 중순 거듭된 기습 폭우에 심란했던 사람이 많았다. 특히 과수농가들이 그랬다.
수확을 앞두고 내린 폭우는 과일 품질에 직격탄이라고 한다. 일조량은 줄고, 한껏 물을 먹으니 당도가 떨어지고 과육이 물러진다. 한동안 '싱겁다'는 혹평이 이어진다. 눈치 빠른 소비자는 지갑을 닫고 농가는 한숨만 내쉰다.
그런데 지난 17일 저녁, 호우경보 속 모인 대구 서구 주민들도 연신 한숨을 뱉었다. 청과물 시장이 아닌 '서구 지역 악취관리를 위한 주민간담회'를 찾은 사람들이었다. 과일 농사야 어쩔 수 없다지만, 대구의 행정기관들은 왜 쏟아지는 빗속에서 '맹탕' 소리를 들어야 했을까. 간담회 내용이 당시 과일처럼 밍밍하기 그지없었던 탓이다.
이날 대구시는 악취 개선 방안을 논의하겠다며 관계 기관과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궂은 날씨에도 주민들은 자리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주민들은 장장 3시간 반 동안 답변을 짜내고도, '과즙' 한 방울 건지지 못했다. 수많은 문답이 오갔지만 속 시원한 설명도, 믿고 기다릴 만한 계획도 전무했다. 기관들은 외려 "노력하고 있다"는 하소연만 늘어놓으며 박한 평가를 자초했다.
이날 간담회가 맹탕으로 끝난 가장 큰 원인은 부실한 준비에 있었다. 악취 관련 팀에 배치된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주무관을 단상에 세운 서구청이든, 3개 과를 총동원한 대구시든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악취 저감 대책의 허점을 따져 물으면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다"며 답변을 미루고, 대책을 강화·추가하자는 제안에는 "당장 도입하기는 어렵다"며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문제는 이날 나온 질문 대부분이 주민들의 기존 요구를 재구성한 것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기관들은 수년간 비슷한 요구를 들어 오면서도, 하다못해 주민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에도 답변을 준비해 오지 않는다. "해결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지적에 발끈할 자격도 없다.
이날의 백미는 염색산단 이전에 관한 문답이었다. 주민들 앞에서 대놓고 '눈 가리고 아웅'을 했다.
대구시 답변을 요약하자면 "강제 이전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입주 업체들의 이전이 동의율은 계속 바닥이지만, 어떻게든 오는 2030년까지 염색산단을 군위군으로 이전하겠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서구 주민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지난해 나왔다는 '이전 타당성 연구 용역' 결과로 향했지만, 대구시는 이날도 비공개 입장을 고수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이대로 덮어 두다 염색산단 이전이 무산되면 그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지려고 이러나. 또 술에 물 탄 듯, 간담회에 빗물 탄 듯 어물쩍 넘어가는 건가.
서구 지역 악취는 비가 오면 유독 심해진다고 한다. 간담회 날 주민들은 더욱 진해진 악취든, 형편없고 싱겁던 답변이든 죄다 쏟아지는 비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난 실패는 모두 비 때문인 셈치고, 빠른 시일 내에 새 간담회를 열어 잘 마무리하면 되지 않을까. 마침 요즘은 언제 비가 내렸었냐는 듯, 전국이 기록적인 폭염을 겪고 있다. 과일과 간담회의 당도(?)도 다시 가파르게 차오를 때다.
설령 날씨와 간담회 수준이 상관없대도 방법은 있다. 다음 간담회를 악취 유발 지역 코앞에서 여는 것이다. 간담회의 당도는 몰라도 악취 농도는 분명 올라간다. 각 기관이 내놓는 답 또한 더욱 현실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안이 떠오를 때까지 고통이라도 함께 체감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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