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수필가 이양하는 '신록 예찬'(1947)에서 "가장 연한 초록에서 가장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고 했다. 초록 중에 어떤 색조를 더 좋아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신록(新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4월이 진행되면서 먼저 난 잎은 짙은 초록이 되고 나중의 잎은 연한 초록을 띠며 서로 뒤엉킨다. 신록 가운데에 희고 붉은 꽃이 여기저기 피어나 초록과 어울리면 진풍경이 된다.
이맘때 경북대의 신록은 장관이다. 지난 일요일 캠퍼스 전경을 내려다보다 문득 지난 3월 산불 피해가 심했던 경북 북부지역이 떠올랐다. 그곳 주민들을 생각해 보니 신록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이 죄스러워졌다. 의성 출신의 동료가 고운사(寺) 걱정을 늘어놓던 말이 떠올라 직접 가보려 중앙고속도로를 탔다.
일직터널 전방 5km 지점부터 산불에 탄 자국이 나타나더니 터널로 접근할수록 불에 탄 비율이 늘어났다. 터널을 통과하니 거의 80~90%가 불에 탔다. 불에 살아남은 산기슭 초록 층과 그 위를 짓누르는 짙은 갈색 층은 여름과 겨울, 삶과 죽음처럼 서로 대비되며 엎드려 있었다.
남안동 나들목으로 빠져 등운산 고운사로 향했다. 고운사 5km 전방에 있는 폐허가 된 팽목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입구엔 다 타버린 나무 한 그루가 팽목리 표지석을 지키고 있었다. 중장비 몇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소된 주택의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그 안쪽엔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 거주처가 십여 동 설치돼 있지만 주민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운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800여 미터를 걸었다. 좌우의 등운산 줄기와 그 가운데 있는 개울가의 200~300 미터 평지는 전소됐다. 큰 사찰 입구에 흔히 늘어서 있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숲은 고운사에도 있었겠지만 시커먼 도깨비 무리가 되어 늘어서 있었다. 이러한 괴괴한 형상들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고운사가 나왔다.
계곡 좌편에 있던 건물들은 전소되고 널브러진 기왓장으로 덮여 있었다. 기왓장 위엔 두 쪽으로 갈라진 대종(大鐘)이 쭈그리고 앉아 그날의 참상을 전해주었다. 우측 가파른 절벽 밑에 있는 대웅전은 무사했다. 뒤편 절벽 밑에는 소나무 서너 그루도 살아남아 있었다. 화염을 품은 바람이 등운산에서 대웅전 너머로 거세게 불었으리라. 뒤편 가파른 절벽에 숨은 대웅전과 몇 그루의 소나무는 덕분에 무사했으리라. 대웅전을 지키려 스님들, 소방관들, 주민들이 사투를 벌였으리라.
안동시도 산불 피해가 심했으므로 임하면 고곡리로 향했다. 안동남부순환도로를 타고 인덕터널을 지나면 온 세상이 겨울이다. 침엽수가 탄 자리는 밝은 갈색, 활엽수가 탄 자리는 짙은 갈색이거나 검정이었다. 꿈을 꾸는 듯한, 지옥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순환도로에서 내려 우측으로 난 계곡으로 방향을 돌렸다. 고곡리 어디에도 신록은 없었다.
계곡의 끝은 진사마을이었다. 마을은 폐허였고 사방은 무채색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넋을 놓고 길가에 앉아 계셨다. 여든일곱의 박중자 할머님이다. "안동 시내에 사는 셋째 아들 집으로 피난했어요. 이웃들은 친인척 집이나 구호소로 다 흩어졌지요. 오늘은 중장비가 내 집 잔해를 정리한다고 해서 왔는데, 뭐라도 건질 게 있을까 싶어 왔는데 장비가 아직 안 오네요." 오후 세 시였다.
이제 안동시 길안면을 거쳐 청송 쪽으로 차를 몰았다. 양곡재를 넘어 청송읍까지 가는 20km가 넘는 도로 좌우의 천지도 흑백영화였다. 청송읍에서 생수를 살 때 주인이 말했다. "그날 밤, 저는 아이들 데리고 피난을 갔고 남편과 아버님은 이곳에 남아 점포로 날아드는 불똥을 껐어요." 다행히 청송읍은 타지 않았다.
필자는 피해 지역의 극히 일부만 돌아본 것이다. 피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아직 건물 잔해도 정리하지 못 한 곳이 많아 임시주택도 들여놓을 수 없다. 정부와 지자체는 물론이고 전 국민이 나서야 한다. 필요하다면 군 인력도 동원해야 한다. 이제 곧 장마가 올텐데도 산기슭을 정비할 엄두는 전혀 내지 못하고 있다.
어떡하든 이재민들이 다시 희망을 품고 살게 해야 한다. 그들에게 신록을 돌려줘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야당 대선후보 확정 뉴스가 흘러나왔다. 정치가 국민을 업어줘야 하는데 국민이 정치를 업고 살자니 허리가 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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