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김태진] 겁박 정치의 말로(末路)

입력 2025-01-20 20:14:18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백인의 짐을 져라. 너희가 기른 최선을 최전선에 보내라… 반은 악마요, 반은 아이인 자들에게."

'정글북' 등으로 190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이 쓴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의 일부다. 20세기를 바투 앞둔 1899년 발표됐다. 형식은 시(詩)이나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된다. 화자는 미개한 이들을 바르게 이끄는 게 백인의 짐, 의무라고 말한다. '제국주의 합리화'라는 평가를 부정하기 어렵다.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고, 12·12의 주역인 전직 대통령 둘을 재판정에 세운 '역사 바로 세우기'가 지난해 비상계엄 사태 직후부터 재연되고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시대정신으로 설파(說破)하는 이들은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과 그 지지자들이다. 민주화 세력임을 자부하는 이들의 입장을 키플링의 시에 대입하면 어색하지 않다.

이들의 개념 정리에 따르면 속칭 '내란동조세력'은 교정하든, 처단하든 정리해야 할 대상이다. '싹 쓸어버리자'는 구호가 당연시된다. 적국(敵國)인 독일 나치에 협조했던 비시(Vichy) 정부(1940~1944년) 관련자들을 프랑스 정부가 처단했던 것처럼 매조져야 한다는 목소리다. 프랑스 정부는 1944년부터 1953년까지 10년 동안 35만 명을 나치 부역 혐의로 조사해 12만 명을 재판정에 세웠고 이 중 1천500명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공감하기 힘들다. 이들이 지칭하는 내란선전·내란동조세력의 대표 격이 윤석열 정부의 국무위원들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披瀝)하지 않고 비상계엄이 실행될 수 있도록 방치했다는 게 이유다. 윤석열 정부 국무위원들이 매국(賣國)에 앞장서기라도 했는지, 대한민국을 옥죄어 적국인 북한에 갖다 바치겠노라며 내부 결속을 다지기라도 했는지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런데도 때가 되면 반복되는 기상나팔처럼 누가 내란동조세력인지 확인시킨다. "네가 심판받을 차례도 곧 오니 자중하고 있으라"는 식이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한덕수 국무총리, 최상목 현 권한대행에게는 민주당이 내란동조세력으로 분류해 놨다고 수차례 확인시켜 줬던 터다. 이런 겁박 정치의 말로는 예측이 가능하다. 여론의 우세로 정국 주도권을 쥔 것은 참작할 만하지만, 상대의 궤멸을 목표로 삼은 건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공존 가능성을 없다고 보는 듯해서다. 이런 무도함은 자신들이 더 청렴하고 정당하다는 선명성(鮮明性)에서 나온다.

국민의힘 지지율 상승 국면마저 내란선전의 불순한 목적을 가진 무리가 꾸민 자작극으로 풀이한다. 설문 문항이 이상하거나 설문 대상에 국민의힘 지지자가 많았다는 반론이다. 20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의힘 지지율이 오차 범위 밖 우위였는데 민의가 왜곡될 문항은 없었다. '정당 지지도'(어느 정당을 지지하거나 약간이라도 더 호감을 가지고 계십니까?)와 '차기 대선 집권 세력 선호도'(만약 대선 정국이 조기에 열린다면, 대통령 선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십니까?)만 담백하게 물었다.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 체제가 시작된 뒤 기사나 칼럼에 좌표를 찍어 맹폭하는 등 민주당의 투쟁력은 한층 높아졌다. 당원 정치를 슬로건으로 앞세운 민주당이다. 당원 요구를 따르지 않으면 '수박'이라 공격받던 기억이 선하다. 강성 당원의 목소리가 과표집(過標集)된 게 민주당의 현주소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