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엄재진] 오욕·혼란의 역사 되풀이한 '을사년'

입력 2025-01-19 15:39:27 수정 2025-01-19 18:24:00

엄재진 북부지역 취재본부장

엄재진 북부지역 취재본부장
엄재진 북부지역 취재본부장

음력 1월 1일인 오는 29일 '을사년'이 시작된다. 12지(支) 가운데 유일의 상상 동물인 '청룡'이 유연함과 장수를 상징하는 '뱀'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날이다.

특히, 2025년은 '푸른 뱀'의 해다. 을사년에서 '을'(乙)은 푸른색을 상징한다. 또, 동양의 오행에서 '나무'(木)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생명력과 성장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뱀'(巳)은 뛰어난 통찰력과 직관력을 가진 지혜의 동물이다. 이 둘이 합쳐진 을사년은 새로운 시작, 지혜로운 변혁, 성장과 발전을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뱀은 '논리의 신' '치유의 신'이다. WHO(세계보건기구) 마크에는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다. 뱀을 치유의 신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대 인도와 불교에서 뱀은 비와 땅을 관장하는 '풍요의 신'으로 숭배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돌이켜 보면 '을사년'은 오욕과 혼란의 역사를 되풀이해 왔다. 우리는 주로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한 것을 에둘러 '을씨년스럽다'고 말한다. 을사년을 빗댄 말이다.

한글 문헌에 현전하는 첫 사례는 이해조가 쓴 신소설 '빈상설'(1908)의 '을사년시러워'이다. '송남잡지'(1855)와 '한영자전'(1897)을 통해 적어도 19세기 중반부터 사용된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83년과 1784년 2년에 걸쳐 큰 흉년이 들었고, 그에 따른 전국적인 규모의 구휼 사업이 실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에 '한영자전'의 설명처럼 연이은 기근 탓에 민심이 흉흉했을 '1785년 을사년'의 기억을 토대로 해당 표현이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1905년 을사년'은 대한제국의 실질적 외교권이 박탈된 불평등 조약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졌다.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주권의 상징인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통감부가 설치됐다.

이는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로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의 단초를 제공했다.

일본의 조선 강점은 1910년부터 이루어졌다. 하지만 실제 강점은 1905년 을사년부터 시작됐다. 그런 점에서 1905년 을사년은 나라를 잃은 해였다.

'1965년 을사년'도 1951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회담에서의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배상요구를 8억달러의 돈으로 매듭지은 '한일협정'이 체결됐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는 없었고,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 징용자, 독도 문제 등도 누락됐다.

다시 60년이 흘러 '2025년 을사년'이다. 새롭게 맞은 을사년도 탄핵 정국과 헌정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체포·구속이라는 오욕과 혼란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헌정사상 현직 대통령의 첫 구속 사태를 둘러싸고 정치권과 사회적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대한민국과 민주주의의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을사년이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있다.

여야 대치 정국은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어 있다. 정치의 실종 시대에 서민의 삶은 더욱 '을사년스럽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이제부터라도 생명력과 성장, 통찰력과 직관력을 상징하는 '푸른 뱀'의 해가 의미하는 새로운 시작과 지혜로운 변혁의 을사년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올해는 그동안 오욕과 혼란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을사년스럽다'를 끊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