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망년회의 추억

입력 2024-12-12 14:30:00 수정 2024-12-12 16:36:16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2월 11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2월 11일 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

'해방 이후 일반의 눈을 거슬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도탄에 허덕이는 민생 문제를 비웃는 듯 호화롭게 먹고 놀자판이 되었으며 모리배와 탐관오리들의 온상이 된 고급 홍등가의 폐쇄는 당연한 단안으로 통쾌스러운 사실이라 하겠으나 생활을 위하여 이 방면에 적을 가졌던 8백 명의 기생, 여급들은 장차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이며 부양가족 3천 명에 가까운 식구들의 운명이 염려되고 있는 만큼~.'(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2월 11일 자)

세밑을 앞두고 요정과 카페 등의 업주와 종사자들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다. 낼모레면 유흥장이 폐쇄돼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요정과 카페 외에 요리점과 바, 카바레, 댄스홀, 기생 작부 식당 등의 유흥업소는 모두 영업금지 대상이었다. 유흥업 금지령은 한 해 전인 11월에 이미 입법의회를 통과했다. 유흥업 금지 이유는 사회 폐풍 타파와 민생 문제 해결, 업태부 해방 등이었다. 유흥업 금지를 민생 파탄의 원인으로 연결 지은 것은 당시 정치‧경제적인 혼란으로 빚어진 위정자에 대한 돌팔매질을 무마하려는 고육책이기도 했다.

고급 유흥업소의 주요 고객이기도 했던 위정자들의 변신은 재빨랐다. 유흥업소를 만인의 악으로 치부했다. 유흥업소를 배부른 자의 놀이터로 봤던 서민들 편에 서서 갑자기 정의의 배달부처럼 행세했다. 이전부터 고급 홍등가는 모리배와 탐관오리들의 온상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업소에서 일하며 착취당하는 여성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업소의 단골이기도 했던 고객이 급작스레 유흥업소를 만인의 적으로 간주하고 영업금지 법까지 만든 셈이었다. 그 시점에는 여순 사건이 일어나는 등 사회‧정치적으로도 극도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유흥업소의 영업금지는 사회 폐습 타파와 여성 종업원 권리 보호 등 명분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전업 대책 없이 업소가 문을 닫으면 종업원들은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대구권번 등에는 800여 명의 기생과 여급이 있었고 부양가족만 3천여 명에 달했다. 화월, 수향원, 우송정 등 대구부 9개의 주요 요정에도 종업원이 2천여 명이었다. 무엇보다 영업정지가 12월에 시행된 데 대한 불만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홍등가는 망년회가 열리는 섣달이 일 년 중 최대의 대목이었다. 유흥업 금지령이 유명무실해지는 원인 중의 하나였다.

송년회나 망년회는 갑자기 생긴 관습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성행했던 연례행사였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잊고 싶었던 일이 차고 넘쳤던 때문이었을까. 그때는 송년회보다 망년회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항일단체인 신간회와 대구노동회 같은 노동단체 등도 망년회를 열 정도로 보편화된 행사였다. 그렇다고 망년회 성격이 다 같지는 않았다. 식민지 조선인들의 망년회는 친일 단체나 일본인들과는 의미가 달랐다. 망년회를 통해 일제에 대한 투쟁을 되돌아보고 새해의 의지를 다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요정 등에서 벌이는 기자들의 망년회 소식이 신문에 곧잘 실렸다. 주로 경북도나 경찰처럼 총독부 산하의 기관이 기자를 초대해 술자리를 열었다. 유흥을 빌미 삼아 일제에 우호적인 메시지를 주고받는 자리로 활용했을 법하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애국 미담이라는 이름으로 망년회 비용을 모금하기도 했다. 직장인 또는 총독부 자동차 운전기사들이 망년회를 열지 않고 그 비용으로 방공 성금을 냈다는 보도는 이를 말한다.

술에다 여흥이 뒤따랐던 망년회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때때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1956년 12월에는 대구시의원들끼리 망년회에서 시비가 붙어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의원의 변절 여부를 두고 싸움이 시작됐고 그 의원은 가래침 세례를 받았다.

또 12월 초순에는 대구 시내 몇몇 은행 지점장들이 망년회로 비난 세례를 받았다. 새벽 1시가 넘도록 고급 요정에서 주지육림에 빠지는 바람에 이들을 기다리는 지프차 운전기사들이 밤새 손발이 얼도록 차 안에서 떨었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난방이 잘되는 차량이 없었다.

어려운 그 시절 망년회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이었다. 그렇더라도 송구영신의 바람은 한결같았다. 어찌 되어도 괴롭고 힘든 일을 잊고 싶은 세밑 모임이 망년회(忘年會)의 추억이었다. 분별없고 무도한 리더로 인해 나라가 결딴나고 장삿집이 망하는 망년회(亡年會)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