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정치인 팬클럽 전성시대

입력 2024-09-26 18:05:21 수정 2024-09-27 01:18:47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세상살이가 힘들고 지쳐도 온전한 내 편 하나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야, 내가 네 편 해줄 테니 너는 너 원대로 살으라!"

영화 '계춘할망'에서 한국인 최초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손녀'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다. 평생 물질로 살아온 해녀 할머니가 죽은 아들의 딸을 키우다 서울 여행 중 잃어버린 지 12년 만에 손녀를 다시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줄거리다. 할머니의 무한한 내리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팍팍한 일상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인 팬클럽 얘기를 하려고 한다. 과거에는 정치인이 지지자들을 관리하는 방식의 하나로 간주됐지만 이제는 유력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있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분위기다.

국내 정치인 팬클럽의 기원은 지난 2000년 탄생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의기투합하고 해당 정치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함께 실현해 가고자 힘을 보태는 조직이다.

이후 '여의도'에선 대선주자급 정치인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팬클럽이 필요하다는 '공식'이 작동하고 있다. 차기 대권을 겨냥하고 있는 유력 정치인 대부분이 현재 팬클럽을 보유 중이다. 하지만 순수한 의도로 출발했던 정치인 팬클럽이 이제는 한국 정치를 망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여야 지도자들이 협치를 통해 국익을 증진시키거나 선의의 정책 경쟁으로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보다 당장 직면한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편으로 팬클럽의 극단적인 주장을 수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팬덤 정치'(Fandom+政治)가 우리 정치를 진영논리에 빠뜨리면서 합의 없는 전장(戰場)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구체적으로 응집력이 높고 활동력까지 갖춘 정치인 팬클럽은 공직선거는 물론 전당대회 등 각종 당내 선거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만 자생 조직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외부 견제는 사실상 없다. 팬클럽의 사랑을 받는 유력 정치인이 현안과 관련해 조심스럽게 당부하는 수준이 전부다.

손녀를 향한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내리사랑과 같이 성원하는 유명인을 향해 '묻지 마 식' 지지를 보내는 팬클럽도 존재한다.

최근 젊은 트로트 가수의 음주운전 사고와 관련해 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고개를 가로젓게까지 하는 팬클럽의 행태가 입길에 올랐다. 사안의 본질은 뒤로한 채 그저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해당 연예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불상사(不祥事)가 발생한 것이다. 해당 연예인은 공인으로서 최소한의 처신을 하지 못했고 팬클럽은 냉정을 잃었다.

정치인 팬클럽은 여느 팬클럽과 달라야 한다. 자신들이 믿고 추종하는 유력 정치인이 완벽한 공인(公人)이고 해당 인물의 활동 무대 역시 공적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당의 한 중진은 "정치인 팬클럽은 주인공인 정치인은 물론 지지 회원들도 냉정과 절제 를 늘 잊지 않아야 한다"며 "그들이 뭉친 이유는 자신들이 믿는 정치인을 통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그 수단은 정부라는 세금을 쓰는 기관의 직책이 된다는 점에서 여느 팬클럽과는 다른 수준 높은 품격을 갖춰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상의 고단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팬클럽 활동은 권장된다. 하지만 정치인 팬클럽 가입과 활동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