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과 동생이 싸웠는데 동생 편만 드는 세상'을 여섯 글자로? 답은 '형편없는 세상'이다. 아재 개그의 하나다. 편 가르기에다 공정을 잃은 우리 사회를 꼬집는 듯하다. 역사를 살펴보라. 대개 낯 두껍고 속 시커먼 후흑(厚黑)의 인간이 승자가 되지 않았던가. 우매한 대중은 양심적이고 진실한 사람보다 음흉하고 뻔뻔한 인간에 속아 그들 편을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아무리 형편없는 세상이라도 눈 부릅뜨고 담담하게 건너가야 한다.
최근 주위로부터 눈물 어린 하소연을 들었다. "선거관리도, 법도, 정치도 다 망했다. 막가는 세상…정치하는 인간들은 썩어 문드러졌다. 믿을 거라곤 세월뿐.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 '나라는 깨부숴지고 산과 강만 남은 듯.' 앞만 보고 살아온 인생이 그저 서럽기만 하다." 그래도 나는 애써서 달랬다. "부정한 것들은 결국 자신이 판 무덤에 묻혀 몰락할 겁니다. 좀 참고 기다려 봅시다." 열불 나는 세상이 어디 지금뿐이랴. 지난날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혼탁한 시대, 원칠근삼(遠七近三)의 안목이 필요하다. 멀리 보는 게 칠, 가까이 보는 게 삼이라는 말이다. 총체적 파악을 신중하게 하고 분석적 파악에 들어가야 한다. 먼저 거시적 흐름과 방향을 읽은 뒤, 미시적 분석과 대책에 몰두해야 한다. 미시적 분석은 절문(切問)과 근사(近思)이다. 절실한 것을 차근차근 캐묻고, 가까운 것들부터 생각해 가는 방식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될 건 되고 안 될 건 안 된다. 그러니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달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태도 말이다. "하려고 하지 않는 데도 되는 것"(莫之爲而爲者)이 "하늘의 뜻"(天)이라 했다.
그렇다면 '하려는 데도 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루려고 하지 않는 데도 이뤄지는 것"(莫之致而至者)이 "운명"(命)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루려는 데도 이뤄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는 흐름에 맞서지 말고, 때론 물살에 배가 밀리듯 관용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편이 건강한 삶에 보탬이 된다. 자주 '나'라는 주어를 잊어도(忘我) 좋다. 사실 나 없이도 모든 일이 다 잘 돌아간다!
일이 꽉 막혀 어쩔 수가 없을 땐 한 수 배울 생각을 하자. 어쩔 수 없는 '부득이'한 것에 대들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이면서, 사태의 본질을 응시하는 연습을 하자. 이것은 회피나 비굴함이 아니다. 냉정하게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럴 때 그 영향력을 넘어서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그 영향력으로부터 덜 괴로움을 당한다. 사태를 일단 빠져나와 멀리서 바라보는 위치에 서자. 그러면 그 번뇌에 말려들지 않는다.
나는 자주 『노자』 의 다음 구절을 곱씹는다. "사물이 강성해지면 노쇠하고 만다(物壯卽老). 이것을 길이 아니라고 한다(謂之不道). 길이 아니면 일찍 끝난다(不道早已)." 무슨 말인가.
우선, 길(道)이란 무엇인가. "이에 말미암아 가야만 하는 것"(由是而之焉)이다. 길은 인간과 사물들의 의지처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상에 내던져진 몸은 어쩔 수 없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수많은 길을 정처 없이 걷다 떠난다. '시간의 길(天道), 공간의 길(地道), 사람의 길(人道)', 이 셋을 거쳐야 사람이라는 물건도 제대로 여문다. 그래서 과거 어릴 적의 공부는 '하늘 천(天), 따 지(地)…'에서 시작해 '사람 인(人)'으로 귀결했다. 인생을 제대로 살려면, 이런 기초공통 교양과목을 잔소리 들으며 배워야 했다.
다음으로, '사물이 강성해지면 노쇠하고 만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과 권력 같은 본능은 점점 크고 많은 것을 원한다. 강경해지고 급기야 브레이크 없이 돌진해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강성해지면 차츰 쇠퇴해지기 마련이다. 실컷 먹으면 숟가락을 놓는다. 소유나 발산이 어느 임계점을 지나면 저절로 끝난다. 강성해짐 속에는 파탄과 종말의 싹이 숨어서 자란다. '열흘 내내 붉은 꽃은 없고, 십여 년 지속되는 권력은 없다'고 했다. 사태의 필연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자라면, 애당초 강력해지고 거대해지는 우둔한 길을 택하지 않는다. 가야 할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 공부'라고들 하지만 "해도 달도 차면 기운다"는 저 『천자문』의 '일월영측(日月盈昃)'만 한 게 없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고 했다. 장시간 서 있으면 앉거나 눕고 싶어지듯 강한 의지나 집착, 오만과 방자도 할 만큼 하면 시들해진다. 끝까지 버티다간 한마디로 '골로 간다.' 제대로 된 길이 아니기에 일찍 끝나는 법이다.
"해도 달도 차면 기운다"니, 기운 것은 다시 차오르기 마련이다. 보라, 한때 낡아 으스러졌던 나무가 저토록 푸르른 5월의 가로수가 돼 있지 않은가. 너무 까불지도, 너무 체념하지도 말자. 한 방에 훅 가기도 하고, 꼴찌가 일등 되기도 한다. 부득이한 것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각자의 자리에서 사태의 본질이 뭔지 차분히 묻고 생각하자. 적산가옥처럼 적(敵)도 내 재산이 될 때가 있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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