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재봉 칼럼] 서울의 뉴욕타임스 아시아 본부

입력 2023-11-05 18:10:15 수정 2023-11-05 19:54:21

함재봉
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의 저자

며칠 전 뉴욕타임스 서울지국이 슐츠버거 뉴욕타임스 회장 겸 출판인의 방한을 계기로 주최한 작은 모임에 참석했다. 뉴욕타임스 측에서는 회장 외에도 편집장(managing editor), 논설실장, 뉴욕타임스 국제 사장, 아시아 국장, 서울 지국장, 도쿄 지국장 등이 참석하였다.

이날 나는 뉴욕타임스의 아시아 본부가 서울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50명에 이르는 뉴욕타임스의 기자들이 서울에 살면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놀라웠다. 뉴욕타임스의 아시아 본부가 서울에 자리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일종의 인지 부조화 현상을 경험했다. 평생 한국은 정치와 안보가 불안하고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강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던 나에게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사이자 언론 자유의 상징인 뉴욕타임스가 굳이 서울을 아시아 본부로 정했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안 갔다.

홍콩에 본부를 두고 있던 뉴욕타임스 아시아 본부 일부가 서울로 이전할 것이라는 뉴스를 2, 3년 전 접했던 기억은 있다. 중국이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국가안전수호법'을 2020년 7월 1일부로 시행하면서 '국가 분열' '국가 정권 전복' '테러 활동' '외국 세력과의 결탁' 등 4가지 범죄를 최고 무기징역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에 홍콩에 본부를 둔 다국적기업들과 국제 언론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접했었다.

홍콩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과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임의로 시행한 이 법은 홍콩의 교역에 타격을 입힐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시행 2주 만인 2020년 7월 14일 뉴욕타임스가 '홍콩 지부의 일부가 서울로 이전할 것'이라는 기사를 낸다. 물론 그때도 놀랐던 기억이 난다. 뉴욕타임스의 아시아 본부가 일부나마 서울로 옮긴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아시아 본부 전체가 서울로 옮겨 왔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존재가 나에게 처음 각인된 것은 1970년대였다. 외교관이셨던 아버님을 따라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76년 고등학교를, 그리고 1980년 대학을 미국에서 졸업했다. 그 당시 미국 언론이 한국 관련 뉴스를 다루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낼 때가 거의 전부였다. 특히 뉴욕타임스가 가장 적나라하게 박정희 정부의 권위주의,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노동자에 대한 착취 등의 주제를 다뤘다. 아버님은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느라 동분서주하셨다.

당시 한국 관련 뉴욕타임스 기사의 제목을 일별해 보면 '박 대통령의 한국: 길은 하나뿐이며 그 길은 그의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질문은: 박(정희)은 버틸 수 있는가?' '한국에서의 억압은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잠식시키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안정의 대가는 크다' '서울이 정치적 규제를 강화하다' 등이었다.

그러던 뉴욕타임스가 이제 서울·런던·뉴욕 삼극 체제로 운영된다고 한다.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서울 본부가 세계의 모든 뉴스를 취재하고 이어서 런던 본부가 받고 마지막으로 뉴욕 본부가 받는다고 한다. 서울 본부는 과거처럼 한국이나 동북아 뉴스만 취재해서 뉴욕 본사나 도쿄 지사에 송고하는 것이 아니라 런던이나 뉴욕과 똑같은 인력과 체제를 갖추고 전 세계 뉴스를 다 다룬다는 말이다.

왜 도쿄나 싱가포르와 같이 서울보다 더 일찍 국제화되고 평균 소득도 높은 아시아의 여타 도시들 대신 서울을 선택하였는가 묻자 언론 자유에 있어 한국이 일본이나 싱가포르보다 월등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에 근무하는 기자들에게 한국에서의 생활이 어떠냐고 묻자 모두 대만족이라고 한다.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기자들도 많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어렸을 때 길도, 가로수도, 상하수도도 제대로 없고 수세식 변기, 전화기, TV, 냉장고는 귀할 대로 귀했던 그 도시가 이제 뉴욕타임스 기자들과 그의 가족들의 생활 근거지가 되었단다.

나에게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후진성을 비판하는 미국 언론의 상징이었다. 그러던 뉴욕타임스가 아시아 본부를 서울로 옮겨 왔단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확인해 주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