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오래된 물음이다. 전쟁의 참상을 대하면, 인간이란 가히 모든 것을 살상, 파괴할 수 있는 '잔인한 존재=악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인간은 모든 것을 생육, 건설할 수 있는 '자비로운 존재=천사'이기도 하다.
이 두 극단 사이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 해석은 사실이 아니라 가설이다. 인간은 대답하는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서 스스로의 의미를 갱신, 확장해왔다. 인간의 본성 논의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이다.
칸트는 인간이 본래 악하다는 생각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라 보았다. 반대로 인간이 선하다는 생각은, 프랑수아 줄리앙이 말하듯이, "세네카 이후, 루소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의 호의적인 가정으로만 존재하며, 우리 안에 잠재하고 있을지 모를 '선의 싹'을 지속적으로 자라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동양의 여러 가설 가운데 주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순자의 성악설이다. 이외에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고자의 '성무선무악설',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는 양웅의 '성유선유악설', 그리고 '완전히 선한 상품, 완전히 악한 하품, 이 둘의 혼재인 중품'으로 보는 한유의 '성삼품설' 등이 있다.
성삼품에서 하품은 산스크리트어 '이찬티카(icchantika)'를 음역한 불교의 일천제(一闡提)와 흡사하다. 선근이 끊겨 아무리 수행해도 성불할 수 없는 자, 한 마디로 행주가 될 수 없는 '걸레' 같은 존재를 말한다.
서양에서는 '근본악'이라는 것이 있다. 도덕을 떠나 감정적 충동에 따라 행동하려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근원적인 악으로의 편향성'을 말한다. 동양에서는 악으로 향할 경향성을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 즉 '칠정(七情)'으로 보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칠정이 그대로 근본악은 아니다. 정에 웃고 울며, 정은 한이 되기도 병이 되기도 하며, 때론 메마르고 흘러넘치기도 한다.
하여, 과불급만 없다면 정은 자연스런 인간 본성의 한 가족이다. 달도 차면 기울듯이 악은 일시적 불선(不善)의 상태 즉 선의 결핍=결여이다. 이지러진 달이 다시 차오르듯 근원적 불선은 없고, 본래의 선을 언제든지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도 사람은 가르치고 다듬으면 선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사람이 선하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다듬고 바로잡은 것[僞. 교정]이다" "곧은 나무도 구부리면 둥근 바퀴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둥글어진 것은 다시 곧게 펼 수 없다". 인간이 한번 선하게 되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며, 그 단서인 측은・수오・사양・시비의 감정을 확충하면 인의예지의 덕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성선설에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단정 짓게 되면,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지 않고 사악해지지 않는지를 본성 내에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악의 근거'를 찾아내기 어렵다는 말이다. 반대로 성악설에서는 '선의 근거'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한편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성선설은 기독교 세계에서 논해진 "모든 것은 선이다(Tout est bien)"라는 '낙관주의(optimism)=최선설(最善說)'과 닮아있다. 1755년 11월 1일 만성절 아침,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발생한 대지진 및 쓰나미로 도시는 폐허가 되고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1756년 <리스본의 재액에 대한 시 혹은 '모든 것은 선이다'라는 공리에 대한 검토>라는 시를 쓴다. 그는 여기서 리스본 대지진에 대한 처참한 심경을 토로하고, 그 지진을 신의 심판이라 주장하는 라이프니츠와 포프의 '낙관주의'를 비판한다.
당시 라이프니츠는, 이 세계는 신이 선택하여 창조한 최선의 세계이며 그 조화를 위해 대재앙 같은 악이 존재한다는 신정론(神正論)을 주장하였다. 볼테르는 시의 서문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다' '모든 것은 신의 섭리로 조정돼 있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 없다고 일갈한다.
그는 세계를 창조한 신을 인정하나 그 신은 세계와 별도로 존재하며 세상을 창조한 뒤로는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의 입장에 선다. 결국 인간은 인간 자신이, 신의 도움 없이, 홀로 문제를 해결해가야만 한다. '모든 것은 옳다'에서 '모든 것은 옳은 것이 될 것이다'로 이행시켜야 할 '희망' 뿐이다. 볼테르는 1759년에 쓴 철학적 풍자소설 <캉디드>에서 낙관주의의 허구를 돌발과 우연성으로 무너뜨린다.
"인간은 거짓말쟁이, 사기꾼, 배신자, 학살자, 모략가, 광신자, 위선자, 바보…"라며, 캉디드는 많은 사람을 만나며 차츰 '인간의 악'을 깨닫는다. 소설의 마무리는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였다.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그래서 '모든 것은 옳은 것이 될 것이다'라는 희망 속에서 '우리의 밭'을 암중모색하라는 것이 볼테르의 의도였다.
이 점은 순자의 성악설과 닮아있다. 물론 '난폭한 행동[橫逆]'을 하는 짐승 같은 '미친 사람[妄人]'을 상정하고 이것을 군자에 대비시키는 맹자와도 통한다. 인간은 선을 향한 존재인 동시에 악을 향한 존재이다. 예컨대 퇴계의 '심통성정도'에서는 '마음의 발동에는 늘 선의 경향성(사단)과 악의 경향성(칠정)이 뒤섞여 있기에 그곳을 잘 살펴라!'고 권고한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악은 평범함 속에 혹은 선이듯 꾸밈 속에 디테일로 숨어 있다. 선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선과 악은, 에셔의 그림 '천사와 악마'에 보듯이, 착시를 가져오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유동하기도 한다. 결국 선과 악은 정치와 교육, 그리고 몸과 뇌와 환경의 합작품이다. 선과 악이라고 성급히 단정 짓기 전에, 먼저 왜 그런 규정이 등장하는지 잘 살펴보면 어떨까. 여전히 상상력의 레슨이 필요하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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