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주 경북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빙청과 심홍'은 윤흥길의 단편소설(1977)이다. 빙청(氷淸)은 '얼음처럼 맑음'을 심홍(深紅)은 '짙은 다홍빛'을 뜻한다. 빙청은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진실을 좇는 것을, 심홍은 진실은 무시한 채 주변의 상황과 분위기에 맞추는 걸 나타낸다.
군 비행단 내에서 착륙을 시도하던 훈련 비행기 한 대가 활주로를 벗어나 격납고로 치고 들어와 폭발했다. 격납고는 삽시에 불길에 휩싸였고 안에서 작업하던 병사들은 화상을 입거나 죽었다. 우 하사는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한 달 정도 버티다 죽었다.
본래는 병사들이 순번을 정해 우 하사를 간병해야 하지만 누구도 중화상을 입은 환자를 간호하려 들지 않았다. 주인공 신 하사는 사병이 아니라서 당번을 안 해도 되지만 병사들의 부탁을 받아 당번을 도맡다시피 하며 헌신적으로 우 하사를 돌보았다.
그런데 단순 사고였던 이 사건을 부대에서 피어난 미담으로 꾸미는 일이 일어났다. 우 하사 동기들이 연판장을 돌리고 병사들의 서명을 받았다. 우 하사는 현장에서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지만 격납고 안으로 뛰어들어 동료 세 명뿐만 아니라 군 장비까지 구하고 자신은 중화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언론에도 전해져 기자회견이 열렸다. 우 하사를 생명의 은인으로 삼게 된 세 병사와 부대 간부들, 그리고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인 신 하사가 참석했다. 신 하사를 제외한 모두는 '우 하사 영웅 만들기'를 짜인 각본대로 착착 진행했다. 마침내 신 하사 차례가 왔다.
"사고 당시 격납고 안에서 우 하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예." "그때 우 하사가 뭘 하고 있던가요?"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냥 불에 타기만 했다는 겁니까?" "예." 거짓 증언을 할 수 없었던 신 하사는 기자의 질문에 자신이 본 것 만을 묘사했다. 기자회견은 썰렁하게 끝났고 그 후 신 하사는 여기저기 불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언론은 신 하사 증언을 무시한 채 대서특필했으며 우 하사는 일 계급 특진했고 장례식도 거창하게 치러졌다. 이렇게 조작된 미담은 사실이 되고 신 하사만 사회 물정을 모르는 중뿔난 사람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신 하사가 우 하사 약혼녀에게 전한 편지에서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신 하사의 생각은 이러했다. 첫째, 우 하사를 영웅으로 만들며 법석을 떠는 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오히려 그의 인간다운 죽음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우 하사에게 자기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
둘째, 위 편지를 읽고 있을 시간에 신 하사는 군 범죄수사대에 자진 출두하여 조사를 받을 것이다. 신 하사는 전신에 중화상을 입고 회생 가능성도 없이 고통만 겪고 있는 우 하사를 위해 그를 질식시키려 했다. 죽이러 가보니 우 하사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죽이진 않았지만 살의(殺意)를 품고 실행하려 했음을 자백할 작정이었다.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받을 것이고 진상 조사를 통해 '우 하사 영웅 만들기'의 실체가 밝혀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필자도 살아오는 동안 신 하사가 택한 빙청의 길과 나머지 사람들이 택한 심홍의 길에서 고뇌한 적이 많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도 겪은 바일 것이다. 지난해 말의 비상계엄, 그 후 대통령 탄핵, 그리고 제기된 부정선거론에 대하여 세상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보수가 '헌법과 법률,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면, 위 사안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 따른 대통령 탄핵은 옳았다. 그리고 절차적 위반에 해당하는 몇몇 문제를 침소봉대한 부정선거론은 공상이었다. 빙청의 길을 택한 보수라면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지난 3일의 선거 결과도 빙청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동쪽 지역(강원, 대구·경북, 부산·울산·경남)에서는 어느 길이 옳은지 아직도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문제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의 입장이 애매모호하거나 심홍 쪽에 치우쳐 있어 이 지역 중도 보수층이 떠돌고 있는 데 있다.
누구나 잘못 판단할 수가 있다. 그것을 책(責)하자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새롭게 출발하면 된다. 위 세 가지 문제에 대한 입장이 조속히 정리되어 떠도는 중도 보수가 안착할 수 있길 바란다.
댓글 많은 뉴스
영일만대교 1821억, 남부내륙철도 500억 '예산 칼질'…TK 정치권 강력 반발
이재명식 등거리 외교, 한반도 안보 우려…국제적 고립 자초하나
경북 포항 영일만 횡단대교 길이 절반으로 뚝…반쪽짜리 공사될까
영일만대교 예산 전액 삭감…포항지역 정치권·주민 강력 반발
홍준표, 정계 복귀하나…"세상이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