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전쟁 중에 '주부 안심합쇼!'

입력 2025-06-26 12:16:23 수정 2025-06-26 15:26:13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8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8일 자

'비었던 시장 쌀 방석에 다시 쌀이 쏟아져 나오고 쌀값이 나날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대두 5천250원에서 4천800원까지 떨어져 찌푸린 일반의 이맛살을 펴고 있는데 어제 7일 오전 현재로 쌀값은 다시 4천700원에 떨어지고 있다. 이리하여 전시하 가장 우려되던 식량 사정은 대두 5천원이던 사태 발생 이전에 비해 도리어 쌀값은 폭락을 보이고 있는데'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8일 자)

6·25전쟁이 발발한 열흘쯤 뒤에 신문은 '주부 안심합쇼!'라는 다소 이색적인 제목을 뽑았다. '찌푸린 일반의 이맛살을 펴게 될 것'이란 기사를 쓴 데서 보듯 다소 기분 좋은 내용을 알리려 했다. 시장의 양곡 가게에 쌀이 쏟아져 나와 쌀값이 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대두(大斗)에 5천원을 넘나들던 쌀값이 4천800원까지 내렸다. 대두는 흔히 열 되들이의 큰 말을 일컫는다. 게다가 쌀값은 지방미 반입 등으로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6·25남침 기사는 1950년 6월 27일 자에 보도했다. 호외도 발행했다. 25일 새벽 5시를 기해 북한괴뢰군이 남침했고 아군이 격퇴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국군이 잘 싸우고 있는 만큼 주민들은 동요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당부를 담았다. 또 전시를 틈타 민심을 혼란케 하는 자의 엄단 발표도 들어있다. 악질적인 모리배들이 주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식량을 매점매석해 한몫 챙기려는 행위를 단속하겠다는 경고였다.

예상대로 전쟁 발발 초기에 쌀은 자취를 감추었고 가격은 올랐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면서 쌀이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쌀값 역시 내렸다. 왜 그랬을까. 당시 식량의 공급과 가격은 화물열차 운행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반입량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렸다. 당국은 철도화물에 양곡 운송을 가장 우선으로 활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겠다는 신호였다. 또 남아도는 쌀이 제법 있었다. 전쟁 초기 교통 사정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생산된 쌀이 서울 등으로 반출되지 않은 때문이었다.

쌀값 하락 요인은 더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식량을 미리 비축해 둔 가정도 있었다. 당장에 쌀을 살 필요가 없었다. 은행예금의 동결도 쌀값 하락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모리배들은 은행 돈으로 매점매석의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다만 쌀값 하락에도 하루하루가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은 여전했다. 이들은 돈이 없어 식량 준비를 할 수 없었다. 배급받은 쌀을 팔아서 보리쌀로 바꿨다. 서문시장에서 대두에 쌀이 4천원으로 내렸을 때 보리쌀은 2천원이었다. 같은 돈으로 두 배의 보리쌀은 살 수 있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17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7월 17일 자

'사태 발생 후 일시 각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쌀이 다시 솟아 나온 이후로 나날이 떨어지던 쌀값은 불과 5~6일 사이에 대두 2천여 원이 폭락하여 전시하 희유한 현상을 보이던 것인데 16일 처음으로 쌀값은 약간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 즉 지난 15일까지 쌀값은 최하 대두에 3천200원(서문시장)까지 떨어지고 있었는데 16일 오전 시세는 동 3천500원으로 뛰어오르고 있다.' (남선경제신문 7월 17일 자)

전쟁 초반 폭락했던 쌀값은 어느 시점부터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7월 중순을 넘기면서 서문시장에서는 대두 기준으로 쌀이 전날보다 300원 오른 3천500원으로 거래되었다. 쌀값이 오르기 시작하자 보리쌀도 1천700원에서 2천원으로 덩달아 뛰었다. 이때의 쌀값 오름세 또한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원인이 있었다. 전날부터 일반화물 열차의 운행이 중지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외 일반교통도 원활하지 못해 지방의 양곡 반입이 어려웠다. 대구시는 트럭 5대를 특별운영해 식량 반입을 꾀하기로 했다.

쌀값이 떨어지면서 방출미는 제때 팔리지 않았다. 방출미는 서민들을 위한 식량 공급 대책이었다. 하지만 7월에는 7천석 중 겨우 1할 정도만 팔렸다. 방출미의 수요 감소는 쌀값 폭락과 공급 확대, 모리배의 위축 등이 이유로 꼽혔다. 그렇다고 그 이유가 다는 아니었다. 대상자의 절반 이상이 곤궁해 방출미를 살 여력이 없었다. 이들은 쌀값이 오르면 당장 피해를 봐도 내리면 혜택을 보지 못하는 서민들이었다. 누구든 전쟁의 고통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주부 안심합쇼!'는 누구에게나 적용되지는 않았다.

박창원 교수
박창원 교수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