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현장] 판교의 오징어잡이 배 못지않은 국회

입력 2023-09-19 16:52:07 수정 2023-09-19 19:54:37

강영훈 서울취재본부 기자
강영훈 서울취재본부 기자

4년마다 총선이 돌아오면 지역 주민들에게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가 "다 물갈이해야 한다" "월급에 비해 하는 일이 없다" "세금 낭비하고 있다" "월급 도둑" 등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듣고 자랐던 기자도 별반 인식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수습기자 시절 국회로 출근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치열한 삶의 현장을 목도하게 됐다.

어느 국회의원실에 인사차 방문했을 때 일이다. 한 보좌관은 기자에게 "신입 기자는 정규직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그런 걸 왜 묻나 싶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보좌관은 의원실을 떠나 기업으로 옮겼다.

언제든 옷을 벗을 수 있는 별정직 신분인 보좌진은 항상 불안한 고용 상태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계약 연장을 위해서라도 의원의 재선에 특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밤낮없이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개인의 삶은 보장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국회의원은 휴가나 주말이 거의 없다. 입법 활동에 당 일정, 지역구 일정으로 정신이 없고, 각종 의원실 주최 행사, 대외 행사 축사 참석 등 개인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가정 유지도 쉽지 않다. 모든 것을 정치활동에 초점을 맞춘 만큼 포기해야 하는 게 많다.

상사인 의원이 못 쉬는데 보좌진이라고 다를까? 보좌진도 연차 같은 건 없다시피 하고, 주말에 쉬는 걸 감사하게 여길 정도다. 국회 일정이 없을 때 몰아서 짧은 여름휴가라도 다녀오면 운이 좋은 편이다. 이마저도 선거를 앞둔 해는 어렵다.

의정 보고서 작성, 언론 대응 자료 등 할 일이 태산이다. 의원이 중앙 당직을 맡으면 일은 곱절이 된다. 여차하면 당 차원의 집회나 의원의 지역 행사에 불려 나갈 때도 많다. 정치 지망생인 보좌진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생계형이다.

육아휴직 중인 보좌진은 "육아휴직은 6개월 정도 쓸 것 같지만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대부분 보좌진은 그만두고 나간다. 육아휴직 후 복귀할 수 있게 배려해 준 것도 의원님이 잘 챙겨준 것"이라고 말했다.

출산 장려 정책과 육아휴직 확대를 위해 입법 활동을 해야 하는 국회 보좌진이 정작 자신의 육아휴직은 제대로 보장 못 받는 모순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의원이 4년 계약직인 만큼 1년을 비우면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는 점에선 풀기 어려운 난제다.

이렇다 보니 얼마 전 있던 각 당 보좌진협의회장 선거에서 주요 공약에 연차 관련 내용이 포함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의원의 핵심 업무인 입법 활동은 정책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관계자(부처)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쳐 여야 토론을 수차례 하고 여야 지도부 간 합의가 돼야 비로소 법안이 통과된다.

아울러 지역구 사업도 광역·지방자치단체, 중앙 부처와 협의하고, 예산 확보 등을 위해 국회에서 여야 간 치열한 논쟁을 거쳐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소속된 상임위원회에서 소관 부처 및 정책들을 다루는 것도 당연한 업무다.

일부 국회의원과 보좌진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월급 값은 충분히 한다고 생각한다. 의원들이 놀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바꿔도 되지 않을까.

판교의 IT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으로 사무실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의미의 오징어잡이 배 별칭은 슬프고 안타깝다. 또 한편으로는 이들의 희생과 노고가 오늘날 소프트웨어 강국을 만든 토대가 됐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오는 데 있어 국회의 꺼지지 않는 불도 그에 못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