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꽃이 없는 게 아냐! 무화과(無花果)나무

입력 2023-08-04 16:30:00 수정 2023-08-04 19:23:08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

8월부터 무화과(無花果)가 익기 시작한다. 누르무레한 껍질을 살짝 벗겨 입에 넣으면 꿀처럼 달큼한 과육이 한가득하다. 무화과는 짓무르고 상하기 쉬워 제철에만 맛볼 수 있다. 무화과를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꽃이 없는 과일'이다. 실상은 꽃턱과 꽃대궁이 주머니처럼 자라나면서 그 속에 수많은 작은 꽃들을 품고 있다.

무화과나무의 고향은 지중해 연안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 『성경』에는 과일나무나 비유와 상징으로 수십 차례 나온다.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 6, 7절의 내용이다.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뱀의 유혹으로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은 남자와 여자는 알몸인 것을 알고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부를 가렸다. 인류 최초의 옷이 무화과나무 잎인 셈이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비유

아담과 하와(이브)가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과일을 따먹은 '원죄' 탓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들의 후손들이 여러 가지 수난과 고초를 겪게 되는 이야기에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 올리브나무와 더불어 다양한 비유로 등장한다.

구약성경 「신명기」 8장 8절의 "그 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여는 땅이요, 올리브 나무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는 풍요로운 복지(福地)의 상징이다.

「열왕기」 하 20장 7절의 "이 말을 전한 다음 이사야는 무화과로 만든 고약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무화과로 만든 고약을 가져다 종기에 붙이자 히즈키야 왕의 병이 나았다"는 치유를 의미한다.

신약 성경 「루카복음」 6장 44절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없다"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무화과는 '좋은 나무'의 본보기다.

반면 「마태오복음」 21장 19절에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가 나온다.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가까이 가셨다. 그러나 잎사귀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 맺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자 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다.

예수가 어느 날 아침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길 옆에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아침에 시장해서 열매를 따 먹으려고 가까이 가 봤더니 잎만 무성했다. 예수는 나무를 저주했고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허울만 남은 유대 종교와 제사장을 열매 없이 잎만 가득한 무화과나무에 빗댔다고 해석된다.

무화과
무화과

◆우리가 먹는 과육의 비밀

무화과나무는 손바닥 모양의 넓은 잎을 가졌고 잎겨드랑이에 주머니 모양의 열매가 맺힌다.

열매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고 8∼10월에 거무튀튀한 자주색이나 황록색으로 익는다. 우리가 먹는 무화과 열매 속에는 수많은 작은 꽃을 품고 있다. 꽃이 사람들 눈에 바로 보이지 않도록 숨겨져 있어 은화과(隱花果)라고도 부른다.

무화과의 열매 속에 있는 꽃들은 어떻게 꽃가루받이(수분)를 할까? 열매 속으로 통하는 구멍이 워낙 작아 바람마저 이용할 수 없는 처지다. 그래서 무화과만을 수분시켜주는 전담 곤충인 무화과말벌의 도움을 받는다. 근래에 알려진 사실은 세계에 무화과나무가 1천여 종이 있고 무화과말벌도 1천여 종에 이른다는 것이다. 무화과말벌은 작은 구멍을 통과할 수 있도록 몸길이가 1㎜정도로 작다.

무화과나무 열매는 수꽃과 암꽃으로 구분된다. 수꽃은 꽃가루가 달린 수술과 짧은 암술을 갖고 암꽃은 긴 암술을 갖는다. 무화과말벌 수컷은 암컷이 들어있는 알을 찾아서 구멍을 내고 부화하기 전에 수정을 한다. 암컷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탈출 구멍을 내고 무화과 안에서 죽는다.

암컷은 수열매 속에서 태어나서 수꽃의 꽃가루를 묻혀 구멍을 빠져 나와서 다른 암 열매 꽃 주머니로 들어가 꽃가루를 암꽃에 묻힌다. 무화과말벌은 무화과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일생을 보낸다. 무화과말벌의 산란은 수 열매에만 하게 되고 암 열매에는 꽃가루 전달만 한다.

우리가 먹는 무화과 속에는 무화과말벌의 암컷, 수컷, 애벌레의 사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기우다. 재배하는 무화과나무는 대부분 종자가 형성되지 않고 암꽃의 씨방이 발달한 '단위결실'이다. 다시 말해 무화과말벌이 꽃가루받이를 하지 않아도 열매가 굵게 자라고 익기 때문에 무화과의 꽃과 씨방은 깨끗하다.

21세기 이스라엘 요르단 계곡에서 1만1천400년 된 신석기 집터에서 말린 무화과가 발견됐는데 예전에 가장 오래된 작물로 여겼던 밀과 보리보다 시기가 1천년이나 앞섰다. 발견된 무화과를 분석한 결과 오늘날 재배되는 무화과처럼 씨앗을 맺는 능력이 없어 '작물'로 추정했다.

국내에서 널리 재배되는 무화과나무는 탐스러운 열매만 맺을 뿐 종자가 없다. 그래서 자라는 무화과는 꺾꽂이나 포기나누기, 휘묻이 등의 무성 번식에 의존한다. 축축한 땅에 1년생 가지를 20cm쯤 잘라서 땅에 꽂아 두면 뿌리가 내려서 잘 산다.

천선과나무
천선과나무

◆한국 토종 천선과나무

서양에서 아주 먼 옛날부터 재배한 유실수가 무화과나무라면 우리 땅을 비롯하여 동양에는 무화과와 사촌뻘인 천선과(天仙果)나무가 있다. 남해안 바닷가 야산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따뜻한 지역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무화과 열매보다는 훨씬 잘지만 생김새가 무화과를 닮아서 금방 눈에 띈다. 잎겨드랑이에 달린 구슬만 한 천선과는 말랑말랑하며 익었을 때는 진한 보라색을 띤다. 무화과처럼 육질이 부드럽고 작은 씨앗이 씹히지만 단맛은 거의 못 느낄 정도다. 단맛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입맛에는 '이게 무슨 맛이야, 이걸 왜 먹어'라는 느낌이다.

천선과
천선과

천선과는 '하늘의 신선이 먹는 과일'을 뜻한다. 경상남도 창원의 다호리 고분 발굴 당시 천선과로 추정되는 열매가 나왔다. 서양의 무화과나무 재배종이 국내에 들어오기 훨씬 전인 초기 가야시대 고분에 저승길로 떠나는 망자의 부장품으로 넣어 줄 정도라면 평소에 천선과를 즐겨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선과 열매도 천선과말벌에 의해 수정되고 씨앗을 맺는다. 나무에 상처를 내면 유백색의 액체가 나온다. 유액은 상처 치료 등 항균 작용을 한다고 전해진다.

◆검투사들의 스테미너 식품

무화과는 고대부터 스테미너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가장 좋아한 과일이며 고대 그리스 올림픽 출전 선수와 로마 검투사들의 애용 식품이었다.

뽕나뭇과의 무화과나무는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라므로 무화과는 요사이 무공해 식품으로 인기다. 폴리페놀 등의 성분은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노화, 성인병의 주범인 유해산소를 없애는 항산화 효과가 있고 변비 예방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적 변비 치료약이 나오기 전에는 무화과 열매를 완하제(緩下劑)로 사용됐다.

열매를 따면 꼭지에서 나오는 하얀 유액은 치질치료나 살충제로도 사용됐다. 무화과에는 비타민A와 칼슘, 인 같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돼 있고 식이섬유도 풍부하다. 단백질 분해효소인 피신(ficin)이 들어 있어 소화촉진은 물론 주독과 어독을 풀어준다.

무화과
무화과

우리나라에 무화과나무가 도입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꽃 없이 열매가 열리는데 그 빛이 푸른 자두 같으면서 좀 길쭉하다. 맛이 달아 식욕을 돋우며 설사를 멎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짐작컨대 약용식물로 들어온 것 같다.

19세기 후반 김옥균 등이 일본에서 신품종을 들여오면서 소규모 과원이 조성됐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의 소득 작물로써 무화과 재배단지를 만들면서 대량재배의 길을 열었다.

◆그리스·로마신화에도 등장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종교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에도 등장한다.

대지의 신인 데메테르가 피랍된 딸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다가 피탈로스라는 사람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데메테르는 감사의 선물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주었고 피탈로스의 후예들은 무화과나무 재배의 독점권을 얻어 크게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건국신화의 로룰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태어나자마자 강가에 버려졌으나 다행히도 무화과나무 가지에 걸려 하류로 떠내려가지 않고 어미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이후 양치기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다. 로룰루스가 늑대의 젖을 빨았다는 숲 속의 무화과나무는 공회로 옮겨져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무화과나무의 유구함을 나타내는 신화의 단면들이다.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이하생략)

김지하 시인이 1986년 펴낸 시집 『애린』에 실린 「무화과」에는 우리에게 자아성찰이나 내면의 성숙이 제대로 됐는지 되묻는 듯하다. 암울한 시대에 '내게 꽃 시절이 없었어'라고 투덜대며 신세타령을 하자 무화과는 밖으로 꽃을 피우는 삶보다 더 값진 '속꽃'을 피운다는 걸 일깨워준다.

팩트와 가짜뉴스를 교묘히 버무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진영이 힐거(詰拒)한다. 선동과 구호만 있고 민생을 위한 정치는 실종됐다. 그들이 훈장처럼 내세우던 도덕성도 뒷전이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 많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1990년대 초 「죽음의 굿판을 거둬치워라」라고 일갈하며 생명운동에 앞장섰던 시인이 새삼 무화과나무에 오버랩된다.

선임기자 chungha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