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평생 빚 졌다고 생각"… 이준 중령 특별한 전역식

입력 2023-07-24 16:47:52 수정 2023-07-26 14:39:36

50년 전 아기바구니에 담겨 캠프헨리에 맡겨져…위탁 가정 거쳐 11살에 미국행
2005년 장교로 다시 한국 찾아…"정치가로 인생 2막 준비할 예정"
편견 심하던 시기 교육 못 받고 불우했어도 바르게 성장
아버지에 '아이 거두라' 꾸짖은 중대장 영향, 미식축구 유망주서 진로변경
"고향 대구에서 군생활 마무리 뜻깊어, 평생 봉사하며 나눌 것"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24일 자신의 전역식에서 초청인사들의 축사에 답하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24일 자신의 전역식에서 초청인사들의 축사에 답하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24일 대구 캠프 워커에서 열린 전역식에서 프레드릭 크리스트 미 19지원사령관과 경례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24일 대구 캠프 워커에서 열린 전역식에서 프레드릭 크리스트 미 19지원사령관과 경례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도저히 치유되기 어려울 것 같은 상처도 아물곤 한다. 때론 그 아픔이 새 삶의 원동력이자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놀라운 이야기가 돼 전해지기도 한다. 24일 대구에서 한·미 양국 청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전역한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Yi Jun) 중령 이야기다.

◆캠프 헨리에 버려진 아이

이날 오전 캠프 워커에서는 조금은 특별한 전역식이 열렸다. 이 부대 정보장교 이 중령의 전역식에는 부인과 아들, 누나 등 가족과 동료들은 물론 이 중령이 영어교육 봉사활동을 이어온 수성대학교 간호학과 학생, 김선순 수성대 총장, 김인남 대구재향군인회 회장 등 수많은 한국인들이 찾아 전역을 축하한 것이다. 영관급 장교의 전역식으로는 이례적인 풍경이었다.

미 19지원사령관 프레드릭 크리스트 준장은 "이 중령의 커리어와 인생에 우연은 없었기에 오늘 전역식은 더욱 특별하다"며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나면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군생활 이야기를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그에게는 당연하지 않았고, 우리는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려준다"며 축사했다.

이 중령이 이날 다시 청중들과 나눈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사는 정확히 50년 전인 1973년 7월 24일 대구 캠프 헨리 정문 앞에서 시작한다.

당시 스물두살이던 이 중령의 어머니는 이 중령과 두살 터울 누이가 담긴 아기바구니를 영문을 지키는 헌병에게 맡기고 사라졌다. 남겨진 정보는 당시 부대에서 근무 중이던 생부 '레이먼드 워맥'의 이름뿐이었다.

이 중령의 어머니 역시 한국 전쟁 때 파병 온 미군 병사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색인종 다문화가정에 대한 멸시가 심했던 시절, 편모가정에서 힘들게 살았던 이 중령의 어머니는 미군과 결혼해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만나 이 중령 남매를 낳았다. 아버지는 베트남 파병 후 연락이 끊겼는데 대구에서 복무 중인 것을 확인한 어머니가 애들을 맡긴 것이다.

자식들이 미국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이별이었지만, 갑작스레 아이들을 넘겨받고 당황한 아버지는 남매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 중령을 구한 은인은 당시 아버지의 중대장이었다. "책임지지 않으면 불명예 전역시키겠다"는 불호령을 내린 것이다. 중대장은 선임부사관과 함께 직접 이 중령 남매를 고아원에서 데려오기까지 했다.

이 중령은 "당시 중대장님이 일개 병사였던 아버지의 개인사에 관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그분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깊은 감사를 표했다.

군인 신분으로 가정을 꾸리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이 중령을 위탁 가정에 맡기고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다만 위탁 가정에서의 삶도 녹록지 않아 이 중령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피부색에 대한 편견,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미군 물품이 거래되는 암시장에서 심부름 하고 수고비를 받으면서 살았다.

이 중령은 아버지가 전역하던 1984년 2월 25일 열한살의 나이로 미국에 갔다.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24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24일 전역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풋볼스타의 입대, "내 이름은 이준"

어렵게 입국한 미국 생활 역시 쉽지 않았다. 한국말도 서툴었지만 영어는 더 못했다. 어느 집단에도 속하기 어려운 정체성 문제도 그를 괴롭혔다.

이 중령은 엇나가는 대신 이를 꽉 깨물고 공부했다. 이 중령은 "뭐든 잘 할 수 있다고 믿고 핑계를 대지 않으려는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투지가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또래들보다 4년 늦게 유치원 과정부터 시작했지만 중학생 시절 헌신적인 교사를 만나 학업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고교 시절에는 풋볼에 재능을 보이며 워싱턴주립대에 진학했다. 대학 2학년이던 1993년에는 유명 대회(Alamo Bowl)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등 맹활약했다.

프로 풋볼 선수로서의 삶이 보이던 찰나, 그의 삶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어머니와의 재회였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어머니를 찾아주려 서울의 흥신소까지 동원한 결과 한국에 있을 줄 알았던 어머니가 워싱턴주 타코마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가족들의 집과 불과 40 블록 떨어진 거리였다. 다시 만난 이들은 왈칵 눈물을 쏟았고 이후 매일 연락을 주고 받으며 다정하게 지낸다.

어머니와의 재회를 계기로 이 중령은 진로를 다시 잡았다. 아버지를 호되게 꾸짖은 중대장이 아니었더라면 현재와 같은 삶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군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학군단(ROTC)에 지원했다.

입대 당시 사용한 이름은 아버지 이름을 따 써온 '레이먼드 워맥 주니어'가 아닌 한국명 '이준'이었다. 세살 무렵 모종의 이유로 동대구역 앞에서 미아가 돼 발견됐을 때 누군가 지어준 이름이었지만 그 이름에 스스로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지난 4일 대구 수성대학교에서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영어회화수업을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지난 4일 대구 수성대학교에서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영어회화수업을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다시 찾은 한국, 내 고향 대구

이 중령은 1998년 소위로 임관해 기갑장교로 3년, 이후로는 정보장교로 복무해왔다. 미 국방정보국(DIA)을 비롯해 각지에서 주요 보직을 맡으며 활약해 온 이 중령이 한국 땅을 다시 밟은 건 2005년 2월 25일, 미국으로 돌아간 지 정확히 21년만이었다.

사실 한국 파병은 피하고 싶었다. 이 중령은 "당시 아예 전역할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유년시절 차별받았던 기억, 또 여기서 비롯된 한국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전역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중령은 한국 땅을 밟았다.

막상 한국에 들어오자 서운했던 감정은 눈녹듯 사라지고 상처가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이 중령은 "한국 풍경을 다시 보니 눈물이 마구 흘렀다. 그 동안의 아픔을 털어내고 한국에서 잘 지내보자는 다짐을 했다"고 회상했다.

이 중령은 한국에 가급적 오래 머물고자 노력했고 2010년까지 용산과 왜관 등에서 복무하며 한국에 완전히 정을 붙였다. 이 시기 같은 교회에 다니던 한국인 간호사를 만나 결혼도 했다.

이 중령은 2021년 6월 자신이 버려졌던 바로 그 부대의 정보참모로 발령받아 군생활 마지막 2년을 운명처럼 고향 대구에서 보낼 수 있었다.

가장 큰 아픔을 겪었던 도시지만 이곳에서 자라나는 8살 아들을 보면 치유 받는 기분이다. 이 중령은 "사람들이 어디서나 아이를 귀엽다고 하고 좋아해준다. 아들은 한국인 친구들도 많다. 내가 받았던 차별은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궁핍했고 제대로 교육받지도 못했던 유년시절의 아픔은 이제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봉사활동으로 승화시킨다.

이 중령은 대구에 온 뒤로 매일같이 영어교육 봉사활동을 한다. 월요일에는 5~10세 아이들을, 수요일에는 보육시설 아이들을, 금요일에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 수업을 무료로 진행한다.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수성대 간호학과 학생들을 위해 환자들과의 소통에 필요한 영어회화 수업을 진행한다.

이 중령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학생들의 열정을 보면 나도 힘이 나 더 열심히 수업을 준비한다. 학생들에게서 내 자신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중령은 이달말부터 평택에 있는 미군 관련 컨설팅 회사에서 당분간 근무하며 정치가로서의 인생 2막을 준비할 예정이다. 몇년 후에는 워싱턴주로 돌아가 정치 경력을 쌓고 장기적으로는 주한 미국대사가 되는 게 꿈이다.

이 중령은 "언제나 한국과 미국 양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다. 한국과 미국은 가장 가깝고 오래된 동맹이다. 그 관계를 더 가깝게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도 대구와 한국사회를 위한 봉사를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제가 버려졌을 때 사람들이 옳은 선택을 해줬기에 제가 이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대구는 내게 이름을 비롯해 모든 정체성을 줬습니다. 난 이 도시에 평생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4일 대구 수성대학교에서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영어회화수업을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지난 4일 대구 수성대학교에서 주한미군 정보장교 이준 중령이 영어회화수업을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