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평등·박애 외친 혁명가들, 지금의 폭력시위 어떻게 볼까
프랑스가 폭력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여름이면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파리 중심부 샹젤리제(그리스 신화에서 정의로운 사람들이 사는 사후세계, 낙원)로 가보자. 프랑스 부르봉 왕실의 창시자 앙리 4세의 두 번째 왕비인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 마리 드 메디치를 위해 세느강변에 조성된 산책로 샹젤리제. 지금은 전세계 패션계를 상징하는 루이뷔통, 샤넬, 에르메스 명품관이 즐비한 1.8km 길이의 관광 중심지다.
샹젤리제 북서쪽 끝자락에 개선문이 높이 솟았다. 서울 독립문의 모델이다. 나폴레옹이 만든 이 개선문은 로마 황제 개선문을 본땄다. 개선문이 자리한 샤를르 드골 광장은 사방 12개 도로가 방사선으로 펼쳐진다. 개선문 아치를 두고 샹젤리제와 정 반대 방향 도로를 달려 세느강을 건너면 파리의 신시가지 상업업무지구 라 데팡스가 나온다. 고도제한 규제가 심한 파리 중심부와 달리 고층빌딩이 즐비하다.
라 데팡스 구역 북쪽 시가지 낭테르에서 지난 27일 17살 알제리계 청년이 운전 도중 검문에 불응하다 경찰 총에 맞아 숨졌다. 이후 아랍과 흑인계 중심의 시민 저항이 번지면서 프랑스가 폭력시위에 시달렸다. 오는 14일은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발발 기념일이다.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정착된 자유, 평등, 박애 3대 인권 정신을 잉태한 234년 전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프랑스 대혁명 발발 장소.
대화재 이후 복원공사가 한창인 파리 시테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세느강 아르콜 다리(1796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친 아르콜 전투 기념)를 건너 20분여 걸으면 바스티유 광장이 나온다. 1만여 명의 파리시민이 1789년 7월 14일 정치범 수용소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불타오른 프랑스 대혁명 발생 현장이다.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 무기고를 탈취해 혁명의 불을 지폈다. 광장 한가운데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는 탑이 우똑 솟아 혁명정신을 드높인다. 탑 북쪽으로 바스티유 감옥 터는 지금 국립 오페라 극장으로 바뀌었다. 1989년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아 사회당 미테랑 정부가 민중이 주인이 되는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해 만들었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오페라 극장은 권위적인 색채가 강하다. 일반 국민도 착한 비용에 오페라를 마음껏 감상하는 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와 어울린다는 취지로 만든 극장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3대 정신 자유(리베르테, Liberte), 평등(에갈리테, Egalite), 보편적 사랑의 형제애인 박애(프라테르니테, Fraternite)는 프랑스 공화국의 밑바탕을 이룬다. 유럽국가 모두 자유민주주의 인권 국가지만, 프랑스에서 인종이나 민족, 종교적 편견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은 바로 이 공화국 혁명정신과 문화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어떤 계기로 발생한 것일까?
◆프랑스 대혁명의 배경, 베르사이유 삼부회 개최
파리 시내에서 서쪽으로 15km 정도 거리에 베르사이유 궁전이 자리한다. 전철 C선을 타면 50여분 만에 도착한다. 베르사이유 역에서 내려 10분여 고풍스런 시가지를 가로질러 걸으면 프랑스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호화궁전 베르사이유가 나온다. 17세기 프랑스 루이 14세 때 신천지 아메리카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지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완공한 뒤로, 대를 이은 증손자 루이 15세, 뒤를 이은 손자 루이 16세, 이렇게 3명의 왕은 파리를 떠나 베르사이유에 살았다. 주요 귀족과 외교사절도 마찬가지다. 파리는 일종의 슬럼가라고 할까. 1615년 루이 14세 이후 단 한번도 개최되지 않았던 삼부회가 무려 174년 만인 1789년 5월 5일 베르사이유에서 열렸다.
삼부회는 프랑스에만 있는 독특한 의회다. 당시 영국 의회와 달리 프랑스의회는 신부 등의 사제 계급, 토지 귀족 계급, 평민 계급의 3부로 나뉘었다. 법안이 올라오면 부별 심의를 하다 보니 평민회 입장에서는 특권층인 토지귀족이나 사제계급의 심사에 밀릴 수 박에 없다. 평민과 특권 신분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벌어졌다.
6월 17일 부별 심의에 반대하는 미라보, 시에예스등이 영국식의 신분 차별을 없앤 통합의회, 즉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왕당파의 반대 속에 통과시켰다. 국왕 루이 16세는 삼부회 책임자 네케르를 7월 11일 파면하는 것으로 국민의회에 맞섰다. 왕의 명을 받은 군대가 베르사이유 주변에 배치됐다. 국왕이 탄압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이 개혁을 열망하며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으로 혁명의 방아쇠를 당겼다.
◆삼부회 개최 이유, 미국 독립지원 재정 손실
프랑스 대혁명의 기폭제가 된 삼부회 개최의 배경은 재정고갈이다. 국고가 바닥났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 독립 전쟁 지원이다. 17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지구촌 각지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프랑스가 패하고, 1763년 베르사이유 조약을 맺었다.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손을 떼고 영국에 넘겼다.
그때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에 들어간 비용을 벌충하기 위해 북아메리카에 막대한 세금을 물렸다. 이에 반발한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미국 독립을 선언했다. 1776년 독립전쟁이 터졌다. 프랑스는 못먹는 감 찔어본다는 심정으로 막대한 예산을 들여 미국을 도왔다. 1781년 요크타운 해전에서 미국 독립군과 프랑스의 연합함대가 영국함대를 굴복시켰다.
1783년 20년 만에 다시 한번 베르사이유 조약이 맺어졌다. 이번에는 영국이 무릎을 꿇었다.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다. 프랑스는? 엄청난 재정 적자의 부메랑을 맞았다. 6년 뒤 이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소집한 거다.
◆프랑스 대혁명 배경, 영국에서 싹튼 계몽사상
프랑스 대혁명의 보다 근원적인 배경은 계몽사상의 확산이다.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국가의 법치체계를 갖췄다. 의회권력이 왕권에 앞서는 민주개혁이 이뤄졌다. 토마스 홉스, 존 로크 등의 게몽사상가들은 국가라는 공동체가 왕권신수설에 따른 왕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설파했다.
시민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불안 상태를 극복하고,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보장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국가를 만든다는 시민계약 사상을 싹틔웠다. 시민계약론은 18세기 미국 독립사상의 뿌리가 됐고, 프랑스로도 번졌다.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백과사전을 펴내면서 그 속에 자유민권사상을 담았다.
백과전서파라는 이름이 생긴 이유다. 당국이 금서로 지정했지만, 금서가 더 잘 팔리는 법이다. 프랑스 지식인은 물론 부르주아 사회 전반에 자유민주사상이 퍼져 나갔다. 마침 유럽 사회에 들불처럼 번진 카페와 살롱 문화는 계몽사상 확산의 모태였다.
◆프랑스 대혁명 인권선언 자유, 평등, 박애
7월 19일 바스티유 습격 이후 혁명의 불길이 파리에서 지방 각지로 급속히 확산됐다. 이미 퍼진 자유민권 사상에 부르봉 왕실의 사치와 실정까지 겹쳐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혁명 주도세력은 삼부회를 국민의회로, 이어 헌법제정의회로 바꿨다. 프랑스 구체제 앙샹 레짐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의 기본 헌법을 만들자는 헌법 제정의회는 맨 먼저 신분제부터 폐지했다.
8월 26일 라파예트 등이 자유, 평등, 박애 정신에 기초한 '인권선언'을 가결했다. 왕권신수설이 물러난 자리에 천부인권 사상이 단단히 뿌리내렸다. 이후 100여 년 우여곡절을 겪지만, 오늘날 프랑스 공화국은 그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오늘날 폭력시위를 혁명가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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