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100년 전 치정, 순정과 복수, 연애와 사랑, 가부장적인 모순과 통속 연애담을 엮은 대중소설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뭘까. 1930년대 당대 최고의 대중소설 작가 김말봉 선생의 「고행」, 「찔레꽃」, 「화려한 지옥」 세 편의 멜로적인 통속 소설을 연극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로 재발견한 작품이 있다. 관객들의 높은 관심을 끌고 있는 작품 이야기다.
◆ '망우열전'으로 발견한 김말봉 선생의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
김말봉(1901~1961) 선생은 근대 대중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였다. 영화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던 시절 장편소설 「밀림」(1935, 동아일보), 「찔레꽃」(1937, 조선일보) 두 편을 연재해 독자들이 읽고 보는 재미에 푹 빠질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다. 조선일보에 연재된 「생명」(1956~1957)은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화려한 지옥」(1952)은 당시 창기(娼妓)로 불린 성 노동자들의 비극과 사회제도 문제를 다루었다. 김말봉 선생은 공창 폐지 운동을 주도하는 여성 사회운동가였고 30여 편의 대중소설을 남겼다. 김말봉 선생의 작품들은 『한국 대중연애서사의 이데올로기와 미학』의 저자 진선영 국문학 박사에 의해 전집 10권으로 출판되어 있다. 김말봉 선생의 통속소설은 읽고 보는 재미에 빠질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다. 소설의 언어는 영화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생산해 내면서 당대 최고의 대중소설작가로 꼽혔다. 매체가 다양하지 않았던 시절, 지금의 김수현, 김은숙 작가 이상의 스타작가였다.
대중들과 연구자들에게 낯설었던 김말봉 선생의 작품을 연극으로 무대화하게 된 것도 우연한 기회였다. 정안나 연출이 '한국연극인복지재단'과 '중랑문화재단' 공동으로 망우리 공원 망자 중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와 삶을 낭독극으로 발견하는 프로젝트 '망우열전'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연출은 "제가 받은 리스트에는 여성은 단 4명밖에 없었어요. 90% 이상이 남자분들이었는데 충격적이었죠.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이트를 뒤져서 찾아낸 인물이 바로 김말봉 선생이었습니다." 극단 수수파보리와 김말봉 선생의 인연은 그가 망월동에 잠든 지 70년 세월이 지나서였다. 정안나 연출이 선생의 작품을 읽고 작품을 구성해 나가면서 연극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읽을수록 재미가 있는 거예요. 100년 전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과 인물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요즘 읽어도 현재성이 많은 작품입니다."
연출은 작품에 대한 애착이 커졌다. 「고행」, 「찔레꽃」, 「화려한 지옥」 세 편의 소설을 묶어 무대의 구도를 만들고 통속소설의 묘미를 연극화시키는 작업으로 이어갔다. 그 시대를 복원하고 현대화하기 위해 만담, 변사극, 신민요와 악사, 신극과 영화적 다양한 표현기법을 활용해 연극적인 살점을 만들어 갔다.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의 윤곽이 무대로 그려졌고 지난해 '산울림고전극장' 초연 당시 11회 공연에 60석 극장은 689명이 관람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번 재공연에서는 대학로의 대표적인 남명렬 배우가 합류하면서 기대감도 높였다. 전작 공연보다 비교적 커진 무대공간에 맞도록 영상과 무대, 장면과 상황 구성을 재정비하고 악사들의 역할과 배우들의 놀이성을 극대화했고, 이를 통해 원작과 당대의 짙은 멜로성과 통속소설의 맛을 현대적으로 살려내면서 작품은 입소문이 났고 많은 관객이 한성아트홀 극장을 찾고 있다.
◆ 정안나 연출의 총체성과 극단 '수수파보리' 통속소설의 재발견
정안나 연출이 이끄는 극단 '수수파보리'는 2010년도에 창단했다. 밀양공연예술축제에서 <처용, 오디세이>(2014)로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을 수상한 후 <당신의 인생이 예술입니다>(2020), <공기의 딸들>(2020), <중랑, 사람꽃>(2022), <살아-잇다/ 야간괴담회>(2022), <낭만궁궐 기담극장>(2023) 등의 작품을 발표해 왔다. 정안나 연출은 극장공연보다 드라마가 있는 거리극, 장소 특정 연극, 축제의 퍼포먼스공연으로 극장 외곽에서 총체극으로 더 알려진 연출가다. 연출 표현방식이 무대나 표현공간에서 음악, 악기, 춤, 오브제, 신체로 공간과 표현을 확장 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를 쓰는 연출가다. 장소, 공간, 무대에서 융복합적인 표현성을 선호하면서도 서사와 드라마를 선명하게 표현하는 연출가다. 극단문패도 연출가를 닮아 수수, 파, 보리를 섞었다. 정안나 연출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수수와 무한한 생명력을 지닌 파,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곡식인 보리처럼 오래오래 가슴 속으로 성장하는 연극을 만들기 위해 극단 이름을 <수수파보리>로 지었다"고 할 정도다.
이번 작품도 연출의 장점과 특징을 무대로 배치하고 살려내면서 1930년대 김말봉 선생이 바라본 삶의 풍경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무대화했다는 평가다. 1930년대에 막장 드라마일 것 같은 정안나 연출의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 (드라마터그 배선애, 의상디자인 박소영, 무대디자인 심채선)는 작품 제목부터가 당당하고 공격적이다. 비극적인 사랑과 거부할 수 없는 운명, 복수와 사랑, 신분과 사회적 계급의 엇갈린 운명, 삼각관계로 엮여있는 치정과 사랑, 여성편력적인 통속연애담은 TV나 넷플릭스의 막장 드라마 기초플롯이면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K-드라마 작가들의 막장 플롯에 단련된 관객들은 '별로 안센데?'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관극 묘미는 통속소설의 무대 재현성보다는 1930년대 대표적인 대중소설을 현재로 묶어낸 연출의 총체적 방식에 있다.
단편「고행」은 극중 인물 남편(남명렬 분)이 첩(妾) 미자(신정은 분)에게 집 한 채를 사주고 몰래 만나오다 동생 집으로 찾아온 아내의 등장으로 벽장에 갇혀 일어나는 소동을 다루고 있다. 소설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벽장에 갇혀 있는 극중 인물의 생리적인 묘사와 벌레로부터 공격받고 물어뜯기는 상황들이 절묘한데, 인물의 심리와 내면들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입체적인 표현에 관객은 웃음이 터지고 극 중 장면은 섬세하게 살아난다. 1937년 3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찔레꽃」은 대부호 조만호 일가의 이야기다. 가정교사 안정순(김단경 분)을 향한 조만호의 성적 욕망이 도드라지고, 그의 딸 경애(이세희 분)와 정순의 약혼자 민수(안병찬 분)는 미친 듯이 날뛰는 경애의 말이 기차가 달려오는 철길로 향하자 달리는 말에서 그녀를 구해 준 운명적인 만남이 막대에 말 모양을 그려넣고 두 배우의 놀이성으로 그려진다.
코미디 같은 상황에 해설자는 " 고학생 민수의 고향이 제주도죠. 말 타는건 자연스러운거죠. 통속소설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운명적인 관계설정을 말하며 웃게 만들고 정순, 경애, 민수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삼각관계가 그려진다. 조만호 아들 경구의 정순에 대한 사랑과 침모(針母)의 신분 상승의 욕망, 조만호의 첩 백옥란의 살인 등이 복잡하게 엮여 있다. 「화려한 지옥」은 창기로 살아가는 극중 인물 채옥(김단경 분)을 중심으로 비극적인 삶과 운명, 공창제도의 사회문제를 다루고 있다. 해설자(김하진, 김정환)는 만담콤비로 잘 알려진 고춘자, 장소팔처럼 현대적인 만담가로 등장해 세 편의 소설을 이어주며 작품의 이해를 해학적으로 쏟아내고 그 덕분에 관객은 웃음을 키득거리며 '빵빵' 터진다. 극중 인물로 등장하는 배우가 가수가 되어 신민요와 당대 대중가요를 불러 통속소설의 맛과 장면전환의 느슨함을 현재시간으로 묶어 버리는 것도 연극적인 색다른 묘미다.
◆ 더튠 그룹의 음악, 배우의 놀이성은 '웃음'으로 통속소설을 극대화한 무대
무대 전면에는 영상을 투사 할 수 있는 샤막이 설치되어 있다. 뒤편으로는 악사(더튠 그룹)의 공간이다. 장면을 구축하는 것은 덧마루 하나, 큐브 네 개와 소품들이 전부다. 소설을 입체적 연극적으로 극화하고 확장한 영상의 활용이 돋보인다. 영상이 무대 장면으로 흡수되기가 쉽지 않은데, 겉돌지 않도록 장면의 상황들을 배우들의 놀이성과 간결한 장면전환의 연출적인 배치와 활용으로, 세 편의 소설이 한 편의 장면소설처럼 이어질 수 있도록 무대공간을 객석까지 활용한 점이 좋다. 무대는 전통가요 무대처럼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악사, 배우, 장면의 이동 공간과 해설자들의 공간을 분리했고 극적인 흐름이 유기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등퇴장과 배우의 동선 등이 세 편의 소설을 특징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장면의 배치를 안정적으로 구조화한 것도 특징이다.
특히 그 시대 동요, 만요(코믹송), 신민요와 가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음악그룹 '더튠'의 라이브 연주와 노래, 무대 공간은 외도하는 남편의 기생집(미자)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속에 존재하는 기녀(妓女-채옥)의 삶이 애잔하고 순애보적으로 그려진다. 무대 영상도 등장인물들의 심리적인 내면을 영상으로 투사해 소설을 입체적인 극으로 만들어 내는 것도 연출의 장점이다. 그동안 신민요를 현대적으로 발굴해 온 음악그룹 '더튠'을 코로스로 극중 인물의 삶과 시대의 공간, 근대풍경의 노래와 멜로디로 재현하도록 했고, 보컬을 맡고 있는 농담과 이성순의 1930년대 노랫말의 편곡과 노래(동요 '갈잎 피리', 대중가요 '오동나무'. 김해송 작곡의 '개고기주사') 등은 시대와 인물의 내면으로 확장될 만큼 듣는 마음이 저려왔다.
배우 김단경의 '꽃을 잡고'와 신정은의 '알아달라우요'의 노랫소리도 인물의 내면과 시대를 관통하면서 통속소설의 맛을 제대로 우려내고 살려낸 것은 역할로 분하는 배우들의 놀이성이다. 자칫하면 통속소설은 신파적으로 흐르거나 단조로워서 배우들의 연기와 장면을 현대적으로 확장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도 순애보적 내면과 애틋한 사랑의 전류를 현재시간으로 돌리며 1930년대 신선한 웃음산소를 공급하며 서사는 현대이야기처럼 낯설지 않고 재밌다. 「화려한 지옥」을 마지막 작품으로 배치한 것도 위계질서의 폭력이 된 '미투'의 몸살을 앓았던 한국사회의 문제와 여성가족부의 정치적인 논란, 젠더 평등이 균형을 이루어 가는 시대에 여전히 사회적인 의미는 크다 할 수 있다.
연출과 배우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짠'하면서도 정겹고, 100년 전 막장에서 살아가는 아픔과 애잔함도 있다. 외도남들의 통속적인 사랑에 가정을 지켜낸 헌신적인 여성들과 신여성의 쿨한 연애담, 삼각관계의 치정들이 엮여 1930년대 김말봉 선생이 바라본 그때 그 시절 풍경을 현재시간으로 전환해 120분을 재밌게 달리는 연극이다. 남명렬 배우의 등장으로 작품은 무게감이 살고 극과 장면은 탄탄해진다. 통속소설의 맛을 연극적인 웃음과 재미로 현대적으로 확장하면서도 인간과 삶, 사회제도의 비극성과 사회적인 메시지는 박제된 아픔과 비극성이 아니며 현재에도 유효한 제도와 질서, 모순된 인간의 삶과 욕망이면서도 100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고 있는 사회풍경들이다. 특히 배우들의 앙상블은 1930년대 삶의 풍경을 쏟아내면서도 연기의 타이밍과 박자가 좋다. 배우 이한희는 이미지가 김말봉 선생이다. 연출의 방식이 이번 작품에 효과적인 무대로 배치되고 표현된 것은 감각적인 총체적 융복합 표현성에도 있지만 드라마터그, 무대의상, 무대미술, 배우 등 다양한 작업자들의 전문적인 색들이 작품으로 융합되고 작품의 팀워크와 앙상블로 모아졌기 때문이다.
드라마터그 배선애 평론가는 연출의 무대 채색과 표현성을 존중하면서도 1930년대의 아날로그적인 통속소설의 의도와 작품이 지향(志向)하는 방향성이 무대와 극으로 겉돌지 않도록 잡았다. 무대미술(심채선)의 구도와 대소도구들의 공간 배치가 간결하면서도 1930대와 현재를 오가는 공간의 의미를 개방적인 장면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무대를 활용했다. 무대의상(박소영)도 1930년대를 재현하는 극중 인물로 분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는 점도 시대를 잘 그려내는 데에 일조했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김말봉 선생의 통속소설 3편 「고행」, 「찔레꽃」, 「화려한 지옥」을 묶어낸 이번 작품은 연출의 총체적인 장점을 살려냈고, 대중성과 놀이성으로 재현한 <통속 소설이 머 어때서>의 1930년대 여성들의 삶과 비극성은 여전히 유효한 현재이다. 정안나 연출의 이번 작품은 '통속 소설을 보면 어때서'로 시간을 돌려놓은 볼만한 작품이다. 7월 9일까지 한성아트홀(옛 인켈아트홀) 1관에서 공연하고 있다. "통속 소설을 본다고? 어때서! 짠하고 재밌는데 머!"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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