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 남편 부조금 300만원으로 연명…"딸 공부만큼은 원없이 시켜주고 싶었는데"

입력 2023-05-02 06:30:00 수정 2023-05-02 09:27:30

가정 소홀했던 남편, 간암 말기로 세상 떠나…환경 불만 느낀 아들은 가출
갚아야 할 남편 치료비, 갑상선 기능 항진증으로 일자리도 구하기 어려워
월세 낼 형편 안돼 보증금서 차감…학교서 돌아온 딸 표정 보면 너무 초라해

지난 28일 저녁 시험을 망쳐 자신의 방 침대에서 절망하고 있는 딸 주예은(가명·19) 씨를 심기란(가명·55) 씨가 안아주고 있다. 윤정훈 기자
지난 28일 저녁 시험을 망쳐 자신의 방 침대에서 절망하고 있는 딸 주예은(가명·19) 씨를 심기란(가명·55) 씨가 안아주고 있다. 윤정훈 기자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감정만큼 인생에 구멍이 난다.

심기란(가명·55) 씨 인생에 구멍 낸 남자가 저 멀리 보인다. 병원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년의 남자였다. 마른 몸에 아랫배만 불룩 튀어나와 흉측한 몰골이다. 환자복 차림을 하고서, 꽁초가 될 때까지 연신 담배를 피워 대는 모습도 가관이다. 기란 씨가 다가오니 담배를 끄고 얌전히 부축을 받는 남자. 그와 함께 병동으로 향하면서도 기란 씨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왜 이 남자를 보살피기로 결정했을까. 다니던 일을 그만두면서까지.

"나한테 할 말 없어?"

무엇을 바라고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남자는 잠시 눈을 맞출 뿐, 아무 말이 없다. 엘리베이터는 유독 더디다. 겨우 병실 앞에 도착했다.

"정말 미안했다…."

떨리는 등은 그렇게 말하곤 문 뒤로 사라졌다. 기란 씨는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눈물이 흘러 들어갈 수 없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주가 다 돼가지만, 기란 씨는 그때 흘린 눈물의 이유를 여전히 알지 못 한다.

◆술만 마시고 돈도 제대로 안 주는 남편, 아들은 중학교 자퇴 후 가출

불우한 가정환경에 신물이 난 기란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무 연고가 없는 대구로 무작정 떠나왔다. 대구 시내의 옷가게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벌이가 시원찮았다. 옷가게 일은 그만두고 직업소개소를 통해 경북 한 시골에 있는 다방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남편 주원혁(가명·54) 씨를 만났다. 손님이었던 원혁 씨는 기란 씨에게 첫눈에 반했다. 원혁 씨의 열렬한 구애가 이어졌지만 '연하남' 취향이 아니었던 기란 씨는 한사코 거절했다. 이후 손님들 성희롱에 질려 한 달 만에 다방 일을 그만두고 대구로 돌아왔다. 원혁 씨 또한 포기하지 않고 기란 씨를 따라 대구에 왔다. 기란 씨가 지낼 방을 잡아주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주는 등 원혁 씨는 옆에서 기란 씨를 살뜰히 챙겼다. 기란 씨도 원혁 씨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스물여섯,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너무 이른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알고 보니 남편은 자신에게 열렬히 구애했던 시절 이미 동거하던 다른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는 쌍둥이를 임신했었는데 남편의 강요로 낙태까지 했다. 안 그래도 남편에게 실망이 큰데 시댁 식구들이 기름을 부었다. 집안의 막내였던 남편은 불만이 있어도 기란 씨에게 말하지 않고 시댁 식구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첫째 아들 예찬(가명·28)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큰 아주버님 내외가 다짜고짜 찾아와 통장을 내놓으라며, 앞으로는 자신들이 돈을 관리하겠다고 통보한 적도 있다. 아내가 돈을 헤프게 쓰는 것 같다는 남편의 말만 듣고 그런 것이었다. 억울함에 화가 난 기란 씨는 한동안 타지역에 있는 친언니 집에 머물렀고, 원혁 씨 또한 아내의 가출에 분노하며 둘의 관계는 이때부터 악화 일로를 걷게 됐다.

조그마한 건설업체에 다녔던 남편은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들어오는 날엔 가구를 부수는 등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뒤 돈 몇 푼 남기고 떠나곤 했다. 그렇게 남편이 던져주고 간 돈 30만원 정도로 한 달을 연명했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에 고정적인 일을 구하지 못하고 보험 영업만 간간이 뛰었다. 늘 쪼들리는 형편에 아이들 새 옷 한번 제대로 입히지 못했다. 아들이 초등학생 때 옷에 구멍이 나 수선한 뒤 학교에 보냈더니, 꿰맨 자국을 본 반 아이들이 아들을 놀리며 따돌리기도 했다. 가정환경에 불만이 쌓여왔던 아들은 "자신은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며 중학교 중퇴 후 출가했다.

◆원수 같은 남편의 마지막… 부조금 300만원으로 모녀가 하루하루 연명

특히 남편의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몇 푼 안 되는 생활비마저 끊겨 삶은 더 힘들어졌다. 3개월 동안 월세를 못 내 그전 집에서 쫓겨났다. 노숙인 시설을 알아보던 중 다행히 한 복지재단의 지원을 통해 현재 살고 있는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5만원짜리 투룸으로 4년 전 이사 왔다.

사업이 안 풀리자, 남편은 더더욱 술에 의존했다. 그러다 간에 이상이 왔다. 지난 2월 간경변증이 의심돼 병원을 찾은 남편은 검사 결과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배에 복수와 암 덩어리가 한가득 차 있는 상태라고 했다. 남편에겐 아무도 없었다. 그토록 간섭해 대던 시댁 식구들도 남편을 보살피지 않았다. 기란 씨가 남편의 병간호를 맡았다. 병 간호를 위해 일용직 청소 일도 그만둬야 했다. 정말 밉고 원망스러운 남편이었다. 그런데도 마지막 가는 길은 지켜주고 싶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였을까. 출가 이후 연락이 거의 없던 아들까지 딸 예은(가명·19)이와 함께 병원을 찾아 아버지의 대소변 처리를 도왔다. 이렇게 온 가족이 지극정성으로 돌봤지만 남편은 결국 지난 4월 18일 눈을 감았다.

남편이 떠난 빈자리엔 슬픔과 상처, 그리고 현실이 남았다. 남편의 치료비 1천200만원은 남편의 친구가 대신 내줬지만 앞으로 갚아나가야 한다. 다시 일을 구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건강 때문에 쉽지 않다. 기란 씨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진단 받은 지 20년 가까이 됐다. 쉽게 피로감을 느끼고 기력이 없어 전에 일했던 일용직 청소 업무도 하루 4시간 일하는 게 최선이었다. 혈색소 수치가 정상 수치인 12.0㎎/㎗에 절반밖에 안 되는 6.0㎎/㎗로 빈혈 증상도 심각하다.

이런 몸 상태로 고등학교 2학년인 예은이를 어떻게 키울지도 문제다. 돌봄이 이뤄질 수 없을 정도로 기란 씨 건강 상태가 나빴던 적이 있어 예은이는 초등학교 1년을 유급했다. 미안한 마음에 공부 만큼은 원 없이 시켜주고 싶지만, 학원 하나 보내줄 수 없는 처지다. 학원은커녕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도 조만간 쫓겨날 신세다. 월세 낼 형편이 안 돼 지난 6개월간 보증금에서 월세를 차감하고 있다. 보증금이 소진되기 전까지 새로 살 집을 알아봐야 하지만 당장 생활비만으로도 벅차다. 현재는 남편 부조금으로 모인 300만원으로 생활하고 있지만 오래 버틸 순 없다.

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오늘도 유튜브에 '고등학생 공부'를 검색해 보는 기란 씨. 때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예은이의 표정이 어둡다. 오늘 본 시험에서 수학을 망쳤다고 한다. 그런 딸에게 학원 하나, 과외 하나 더 구해주겠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자신이 초라했다. 기란 씨가 해줄 수 있는 건 풀 죽은 딸을 말없이 안아주는 일뿐이었다.

*매일신문 이웃사랑은 매주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소중한 성금을 소개된 사연의 주인공에게 전액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성금을 전달하고 싶은 분은 하단 기자의 이메일로 문의하시길 바랍니다.

※ 이웃사랑 성금 보내실 곳

대구은행 069-05-024143-008 / 우체국 700039-02-532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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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성금내역]

◆늦은 결혼 끝에 얻은 아들 희귀병 걸리고 수술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간병인에게 아동학대까지 당해 마음 아픈 김대덕 씨에게 2,298만원 전달

늦은 결혼 끝에 얻은 아들이 희귀병(두개골유합증)에 걸리고 수술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는 간병인에게 아동학대까지 당해 힘겨워 하는 김대덕(매일신문 4월 18일자 10면) 씨에게 2천298만4천400원을 전달했습니다.

이 성금에는 ▷법무사 김태원 20만원 ▷성현탁 20만원 ▷김민경 5만원 ▷백미화 5만원 ▷권규돈 3만원 ▷이병규 2만5천원 ▷신종욱 2만원 ▷최선태 2만원 ▷김갑용 1만5천원 ▷문민성 1만원 ▷이용수 5천원 ▷조인숙 5천원이 더해졌습니다. 성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비참한 결혼 생활 속에도 하나뿐인 딸 행복 바라며 버텼는데 딸 역시 가정폭력으로 이혼하고 우울증 극심한 딸 대신 고령의 나이에 손자 2명 키우는 전염선 씨에게 2,203만원 성금

가정폭력으로 이혼하고 우울증이 극심한 딸을 대신해 고령의 나이에 손자 2명을 홀로 키워야 하는 전염선(매일신문 4월 25일자 10면) 씨에게 48개 단체, 159명의 독자가 2천203만1천680원을 전달했습니다. 성금을 보내 주신 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피에이치씨큰나무복지재단 200만원 ▷건화문화장학재단 150만원▷(주)대구은행 100만원 ▷㈜세원정공물산 100만원 ▷(주)태원전기 50만원 ▷세무법인송정 50만원 ▷신라공업 50만원 ▷한라하우젠트 50만원 ▷㈜태린(양홍석) 40만원 ▷최상규이비인후과 40만원 ▷㈜신행건설(정영화) 30만원 ▷한미병원(신홍관) 30만원 ▷(주)동아티오엘 25만원 ▷구미현대병원 25만원 ▷금강엘이디제작소(신철범) 20만원 ▷대백선교문화재단 20만원 ▷대창공업사 20만원 ▷(주)구마이엔씨(임창길) 10만원 ▷(주)삼이시스템 10만원 ▷(주)우주배관종합상사(김태룡) 10만원 ▷(주)이구팔육(김창화) 10만원 ▷경주천마운전전문학원 10만원 ▷김영준치과 10만원 ▷달서구약사회 10만원 ▷대구동양자동차운전전문학원(최우진) 10만원 ▷세움종합건설(조득환) 10만원 ▷신성산업(김용환) 10만원 ▷우리들한의원(박원경) 10만원 ▷창성정공(허만우) 10만원 ▷건천제일약국 5만원 ▷느티나무한약국 5만원 ▷메이연세과(최윤희) 5만원 ▷명EFC(권기섭) 5만원 ▷베드로안경원 5만원 ▷봉산교회(김명묵) 5만원 ▷선남의원(김홍구) 5만원 ▷세무사박장덕사무소 5만원 ▷이전호세무사 5만원 ▷전피부과의원(전의식) 5만원 ▷중앙안과의원(김일경) 5만원 ▷칠곡한빛치과의원(김형섭) 5만원 ▷피플라이프(박태호) 5만원 ▷흥국시멘트 5만원 ▷국선도풍각수련원 3만원 ▷매일신문구미형곡지국(방일철) 3만원 ▷청산(우창하) 3만원 ▷마린슐레 2만원▷사단법인대한민국힐링문화진흥원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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