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상인이 日에 판 총 2정 "이순신을 쏘다"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다. 임진왜란 막바지 1598년 9월 진갑을 막 지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무리한 전쟁을 더 끌 이유가 없었다. 순천 왜성에 머물던 고니시 유키나카는 11월 18일 철군을 단행했다.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서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과 합동공세를 펴 후퇴하는 일본군에 큰 피해를 안겼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총(鳥銃)에 맞아 순국했다.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명나라 장수 등자룡도 조총에 쓰러졌다. 일본은 조총을 어떻게 손에 넣고 조선을 침략했을까?
◆'포르투갈' 해상 접근성 뛰어난 '항구'라는 이름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지점 포르투갈 로카곶. 동쪽 끝 지점은 아시아에 수도를 둔 나라 가운데 한국의 포항 호미곶이다. 한국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먼 땅, 로카곶에서 차로 50여분 거리 남쪽에 항구도시 리스본이 자리한다.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긴 타구스강이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남부 톨레도를 지나 반도를 두루 적신 뒤, 리스본 시가지를 동서로 가르며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항구도시다. 포르투갈(Portugal)이라는 이름 자체가 항구를 뜻한다. B.C136년 이곳을 점령한 로마제국이 포르투스 칼레(Portus Cale)로 부른 게 기원이다. '포르투스(라틴어)'와 '칼레(고대 켈트어나 인도유럽어족 고어)' 모두 항구다. 포르투갈은 '항구항구'라는 뜻이다. 그만큼 강과 바다가 해상 접근성이 뛰어나다.
◆포르투갈 리스본 '벨렝 타워'와 '발견의 기념물'
타구스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 벨렝에 해상요새가 우뚝 솟았다. 벨렝 타워(Tower of Belém)다. 벨렝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베들레햄을 가리킨다. 포르투칼이 1498년 인도 항로를 발견하고 전 세계를 오가는 배들의 출입국사무소로 쓰기 위해 1512년 착공해 1519년 완공했다. 주 임무는 세금징수. 30m 높이의 4층 건물에서 15-16세기 유럽 최고 해양강국 포르투갈의 위상이 묻어난다.
벨렝 타워에서 타구스강 상류 1km 지점에 발견의 기념탑(Monument of the Discoveries)이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전 세계 대양을 누비던 포르투갈 범선 카라크(나오스)선을 본 딴 형태다. 콘크리트로 만든 배 위에 33명의 인물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맨 앞 인물이 15세기 포르투갈 항해 시대를 연 엔히케 왕자다.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코다가마.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메우디아스, 첫 세계 일주를 성공시킨 마젤란이 뒤를 잇는다. 1460년 숨진 엔히케 왕자 사망 500주기를 맞아 1960년 세웠다. 지금은 포르투갈이 유럽대륙의 작은 나라, 축구 천재 호나우두의 나라 정도지만, 대항해 시대 선도국가였음을 잘 보여준다.
◆1415년 모로코 세우타 점령과 엔히케 왕자 해양개척
포르투갈은 보르고냐 왕조(1128년-1383년)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어 보르고냐 왕조 마지막 왕 페르난도1세의 이복동생인 아비스 기사수도회 단장 주앙 1세(재위 1385-1433)가 포르투갈 2번째 왕조 아비스 왕조(1385년-1580년)를 출범시킨다. 주앙 1세가 왕이 된 비결은 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지지와 이웃 나라 카스틸라의 공격을 물리친 덕분이었다.
주앙 1세는 지지기반인 신흥 상업자본세력의 활로를 터주기 위해 해외로 눈길을 돌렸다. 첫 행보는 1415년 북아프리카 모로코 땅의 세우타 점령이다. 200여척 전함에 1,700명의 수병, 1만 9,000명 전투병을 동원한 세우타 점령에 주앙 1세의 셋째 아들 엔히케 왕자가 공을 세웠다.
엔히케 왕자는 자신의 거처 사그레스 성에 항해사, 지리학자, 천문학자를 모으고, 다양한 서적과 지도를 구해 대서양과 아프리카 해안 항해를 추진했다. 세우타 점령 4년 뒤, 1419년 대서양 아조레스 군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두 제도는 오늘날까지 포르투갈 영토다. 1434년 지금은 스페인령인 원양어업기지 라스팔마스의 카나리아 제도로 진출했다.
당시 카나리아 제도의 보자도르 곶 남쪽은 전설상 '무서운 바다(mar tenebroso)'로 불렸다. 선원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다. 아프리카 국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아프리카 항로개척에 적극 나선 아폰수 5세(재위, 1438-1481, 엔히케의 조카)의 정책에 힘입어 불굴의 용기를 지닌 포르투갈 항해 선구자들은 아프리카 해안과 대서양 쪽 섬들을 탐험하며 내려갔다.
카보 보르데 섬과 세네갈을 넘어 1446년 북위 15도 감비아강에 도달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해양개척에만 몰두했던 엔히케 왕자가 1460년 죽었을 때 포르투갈은 기니를 넘어 북위 6도 지점의 시에라리온까지 가 상업적 이득을 취했다.
◆1488년 희망봉, 1498년 인도 항로, 향료 찾아 인도네시아로
아폰수 5세의 아들 주앙 2세(재위 1481-1495)는 아버지의 아프리카 탐험사업을 이었고, 마침내 1488년 바르톨로메우디아스를 시켜 아프리카 최남단 '폭풍의 곶'에 닿았다. 주앙 2세는 선원들의 공포를 줄이려 '폭풍의 곶' 이름을 '희망봉'으로 바꾸었다. 1492년 스페인이 콜럼부스를 후원해 인도에 닿았다는 주장에 자극받은 포르투갈 마누엘1세(재위 1495-1521, 주앙 2세의 사촌 동생)는 1497년 7월 4척의 인도항로 개척선단을 벨렝항에서 출항시켰다.
단장 바스코다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아프리카 동부해안을 북상하며 현지인의 도움을 얻어 인도양을 가로질렀다. 1498년 5월 인도 남서부 고아 지방 캘리컷에 닿아 꿈의 인도항로가 열렸다.
포르투갈은 1505년 알메이다를 첫 인도총독으로 파견하고, 1510년 고어 지방을 식민화한다. 향료 원산지가 인도가 아닌 인도네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말레이 해협을 지나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로 가서 향료 무역으로 큰돈을 번다. 마젤란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문제가 생겨 스페인으로 넘어간 마젤란은 서쪽으로 돌아 몰루카로 가는 방안을 실행했고, 그의 함대는 1522년 인류 역사 최초로 지구 일주를 성공시켰다. 1542년 스페인 탐험가 빌라로보스는 스페인 왕세자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 '펠리페의 섬'이라는 뜻으로 '펠리피나스'로 이름 붙였고, '필리핀'으로 굳어졌다. 1565년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화하기 전에는 포르투갈 역시 필리핀을 오갔다.
◆포르투갈 태풍으로 일본 다네가시마 상륙 조총 전파
일본 큐슈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여 바닷길을 가르면 다네가시마(種子島)섬에 이른다. 고구마가 이곳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몰루카 제도에서 필리핀을 거쳐 남중국으로 가던 포르투갈 상선이 태풍에 휘말려 1543년 8월 다네가시마 섬에 표류했다. 당시 섬 지배자 16살 도키다카는 포르투갈 상인의 총 2정을 사들였다.
부하를 시켜 1년여 만에 자체제작에 성공하고 철포(鐵砲)라고 불렀다. 하늘을 나는 새(鳥)를 떨어뜨린다는 조총은 중국식 이름이다. 무철포(無鉄砲, 무대뽀)는 총도 없이 목숨 내놓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도키다카는 1544년 철포를 상급 영주에게 바쳤다. 치열한 전쟁의 전국시대 조총을 채택한 오다 노부나가는 패권을 확립했고, 계승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했다.
1592년 4월 12일 대마도를 떠난 고니시 유키나가는 13일 부산진에 닻을 내려, 부산진 첨사 정발의 항전을 무력화시켰다. 14일 동래성에 도달해 "전즉전(戰卽戰)부전(不戰)가아도(假我道), 싸울 테면 싸우고 아니면 길을 비켜 달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전사이(戰死易)가도난(假道難),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결사항전 의지를 내걸었다. 조선 군사들은 조총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파죽지세의 일본군은 20일 만인 5월 2일 한양을 점령했다. 신기술 접촉에 뒤져 조총에 무너졌던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역사저널리스트
댓글 많은 뉴스
국힘, '한동훈·가족 명의글' 1천68개 전수조사…"비방글은 12건 뿐"
사드 사태…굴중(屈中)·반미(反美) 끝판왕 文정권! [석민의News픽]
"죽지 않는다" 이재명…망나니 칼춤 예산·법안 [석민의News픽]
尹, 상승세 탄 국정지지율 50% 근접… 다시 결집하는 대구경북 민심
"이재명 외 대통령 후보 할 인물 없어…무죄 확신" 野 박수현 소신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