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3대 시장…조선중기 대구읍성 북문 '공북문' 바깥에 '대구장'으로 처음 형성
인교동 거쳐 1923년 4월 현재 위치인 중구 대신동 일대로 이전
"서문시장은 1919년 3.8 운동 집결지… 대구부청 멀리 배치" 해석
대구 서문시장이 중구 대신동에 자리 잡은 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시장은 '조선 3대 시장', '한강 이남 최대 규모 시장', '섬유산업 메카' 등으로 수식어를 달리하면서 대구의 100년 역사를 함께했다. 본지는 서문시장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중,하 3회에 걸쳐 짚어 본다.
대구 서쪽 문(門) 바깥에 열리는 시장, '서문시장'. 시장이 이렇게 불리기 시작한 건 100년도 전의 일이다. 대구읍성 사대문 가운데 북문인 '공북문' 밖에 있던 시장이 서문, 즉 '달서문' 바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다.
시장은 1923년 4월 1일 현재 위치인 중구 대신동 일대로 한 번 더 이전했다. 두 번째 자리에서 '조선 3대 시장'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번성했고, 종착지인 대신동에서 전국에서 찾아드는 원단 도소매 시장으로 지위를 굳혔다.
◆ 조선시대 경상도 경제 중심으로
서문시장의 시작은 조선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학계에 따르면 서문시장이 처음 생겨난 곳은 현재 중구 북성로~태평로 일대로 추정되는 공북문 밖이다. 과거엔 성곽 주변에 시장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시장 이름은 '대구장'이었다.
시장은 17세기 후반 옮겨간 자리에서 전주장, 안성장과 함께 '전국 3대 장시'로 꼽힐 정도로 발전했다. 이후 '대구 큰장', '대구 읍장' 등으로도 불렸다. 당시 장이 열린 곳은 중구 인교동 중부경찰서 서문지구대(옛 동산파출소) 언저리로 추정된다. 인교동부터 시장북로, 서문로 1·2가, 계산동 1가 등 1만6천여㎡에 상점이 흩어진 형태였다.
경상감영이 대구읍성 가운데 정착하면서 대구가 영남지방 중심 도시로 발전, 사람과 물자가 집중하면서 보다 넓은 곳으로 확장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수로와 육로 교통이 발달하고 서울과 부산으로 이어지는 국도와 접하는 등 입지가 좋아 안동, 고령, 성주 등지에서 농부와 상인이 몰려들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4월 서문시장은 대구부 도시계획에 따라 저수지인 천왕당못을 메운 땅에서 새로 영업을 시작했다. 총독부는 도심 주거지와 상권 확장을 시장 이전 이유로 들었으나 이보다 앞서 1919년 3.8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서문시장을 현재 시청 격인 대구부청에서 먼 곳에 배치하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 1만5천㎡ 크기서 2배 이상 확대
1923년 서문시장은 1만5천21㎡ 규모였다. 현재 면적(3만4천㎡)의 절반보다 작았다. 이전 후 주변 일대가 개발되고 상설 점포가 늘어나면서 성장세를 이어갔다.
대구부 조사 자료를 보면 이전 첫 해인 1923년 서문시장 거래액은 수산물 91만6천원, 농산물 71만9천원, 직물 55만6천원, 축산물 27만1천원, 기타 101만3천원 등 347만5천원으로 집계됐다. 당시 대구 동문시장, 약령시, 어채시장 등의 거래액을 합한 309만8천500원보다 많았다.
서문시장이 '섬유산업 메카'로 큰 건 한국전쟁 이후 특수 경기를 맞으면서다. 전국 최대 규모의 포목·주단 도소매 시장으로 성장했다. 달성공원 주변에는 속옷 등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메리야스, 양말 공장 수백 개가 들어섰다.
1960년대까지 대구는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섬유공업 분야에서 전국적 유명세를 떨쳤다. 대구 58개 동 중 48개 동에서 섬유공장을 가동할 정도였다. 서문시장과 가까운 서구, 북구에는 제일모직, 대한방직, 삼호방직 등 대기업이 분포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과 부산 위주로 전국 유통체계가 크게 바뀐 것이다. 급속한 산업화로 대형 유통업체가 등장했고 백화점, 대형마트가 생겨나 소비 양식에 변하면서 시장 지위는 떨어졌다.

◆ 대구 항일운동 중심 서문시장
서문시장은 단순한 물자 거래 시장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독립운동이 격렬하던 1919년 대구에서 처음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3·8 운동' 발원지다.
대구에서 3·1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한 인사들은 서문시장 한복판에 쌀가마니를 쌓아 만든 임시 강단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1천여 명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했다. 만세운동이 경북으로 확산하는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된다.
3·8 운동은 시장이 대신동으로 옮겨진 배경으로도 작용했다. 때문에 1923년 시장 이전과 이후 성장세를 두고 '식민도시로 전락한 상황에도 조선인 상권의 상징으로 명맥을 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 대구에서 시작한 주권수호운동,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도 있었다. 국채보상운동을 담당할 조직으로 만들어진 '금연상채회'는 국채보상을 선전하고, 의연금을 모으기 위해 서문시장 한가운데인 북후정에서 군민대회를 개최한 걸로 기록돼 있다.
현재 서문시장은 '대구 민심 바로미터'로 통한다. 선거철마다 후보들이 다녀가는 단골 유세 장소가 됐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2012년과 한나라당 대표로 있던 2004년 지지층 결집을 위해 서문시장을 찾았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서문시장 사랑도 남다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선거를 앞두고 서문시장을 여러 차례 다녀갔고, 당선 이후 다시 찾아와 "서문시장만 오면 아픈 것도 다 낫고 자신감을 얻는다"고 인사했다. 지난 1월에는 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서문시장을 찾아 설 명절 용품과 식자재 등을 사갔다.
서문시장에서 승복집을 하는 김범수(60) 씨는 "서문시장의 정통성은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장사한다는 자체가 영광이고, 항상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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